이 영상과 관련해 다양한 패러디가 온라인상에 앞다퉈 올라왔다. 그중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한 여성이 켈리 교수역으로 등장한 패러디물이다. 아이들을 얼른 방 밖으로 몰고 나가는(?) 대신, 무릎에 앉히고 딸랑이로 어르며 인터뷰하는 내용이었다. 단지 성(gender) 버전이 바뀐 것을 넘어 ‘일과 삶의 통합’ 버전의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해서다.
그 영상을 보며 필자의 눈물 젖은(?) 초년병 워킹맘 시절이 떠올랐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정시 출근하고 심야 퇴근해야 했다. 큰딸이 세 살인가, 네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 눈에는 밤에 잠들 때는 보지 못하고, 눈 뜨면 잠깐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엄마가 객처럼 보였나 보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엄마, 또 놀러 오세요” 하고 손님에게 하는 인사를 하지 않는가.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브레인 로버트 라이시는 가족들과 지내려고 장관직에 사표를 던져 한동안 화제가 됐다. 그 결정적 계기로 밝힌 것이 마음에 짠하게 와 닿았다. “막내가 (아빠가) 밤에 퇴근하면 깨워 달라고 고집을 피웠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빠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로버트 라이시 장관의 예는 집토끼를 잡기 위해서 산토끼(장관직)를 내려놓은 경우다.
과연 일과 삶은 동지일까, 적일까. 이에 대한 대응은 네 가지 유형의 사고방식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양자 택일 사고다. 어떤 방식의 균형을 선택했든지, 하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어느 한쪽은 양보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일종의 교환으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할지 스스로 나누는 것’이다. 남과 똑같이 일하고, 누리고자 하면서 경력과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는 논리다. 이들 유형은 커리어를 원하면 결혼, 자녀를 포기하는 것이 예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행복이나 결핍을 성공에 대한 만족감으로 대리 만족한다고 주장한다. 로버트 라이시 장관 같은 예도 일과 삶을 병립불가의 양극단(兩極端)으로 본다는 점에서 같은 사고방식의 연장선이다. 이들에게 선택은 곧 포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늘 뭔가를 희생시켜야 하고, 그것에 대한 회한은 깊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반반(半半) 평균 논리 유형이다. 일과 삶을 50대 50의 산술적 평균으로 배분하려고 한다. 일과 삶이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총총거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삶이란 게 산술적으로 반반 나누기 힘들고 체력적으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앞의 양자택일(兩者擇一)형이 완료형이라면, 평균형은 현재진행형이다. 늘 일과 삶이 대립돼 싸워 시간, 체력, 감정의 대립으로 소진된다. 좌절감, 죄책감, 심리적 혼란, 불안감으로 허덕인다. 늘 현재 하는 일에 몰입하기 힘들고 분산돼 강박감과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쉽다.
셋째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의 논리다. 먼저 성공을 거두고 나면 일의 유연성, 자율성이 높아지니 ‘일단 성공부터 거두고 보자’는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이 ‘일도 삶도 한꺼번에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은 파도 타기의 평형에 비유할 수 있다. 때에 따라 강약과 완급을 조절할 수 있다고, 조금은 유연하게 생각한다. 평형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기우뚱거리면서 무게 추를 옮기며 균형점을 조절한다. 문제는 인생에서 ‘유보’나 ‘연기’가 불가한 그때 그때 함께 해야 할 일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튜어트 프리드먼(Stwart D. Friedman) 와튼스쿨 교수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일과 삶의 조화를 꾀하는 ‘토털 리더십’을 제안한 바 있다. 일과 삶, 두 가지 영역을 동시에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상충적이 아니라 상보적으로 발전시킬 융복합적 사고를 하라는 주문이다. 조각 파이가 아니라 나무테의 동심원으로 발전시킬 방식을 고민하고 제안하고, 조직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보라. 성공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켈리 교수의 방송사고 패러디물에 남자 주인공이 아이를 얼르며 환하게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앞으로 직장인 후배들 중에 자녀들로부터 “엄마(아빠), 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을 듣고 피눈물 흘리는 이가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