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집의 조상님쯤 되는 장원의 여주인 고(故) 주정순 씨는 평소 종업원들을 철저히 단속해 은밀한 대화가 결코 담을 넘지 않도록 했다. 덕분에 장원은 거물급 정치인들의 ‘밀실 정치’ 무대로 활용됐고, 기업인들과 고위 정관계 인사들 간에 이뤄진 접대와 청탁의 장소로도 쓰였다.
그런데 입이 무겁기로 이름난 주정순 씨가 생전에 남긴 한마디가 있다. 반세기 가까이 장원을 운영하면서 권력과 기업인의 갑을 관계를 지켜본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얻어먹고 유세 떠는 놈은 계속 바뀌는데, 밥값 내고 고개 숙이는 쪽은 맨날 그대로더라.”
힘을 가진 지배 세력은 세월 따라 뜨고 지며 바뀌어 갔지만, 그들에게 쩔쩔매며 접대하는 기업인들의 씁쓸한 세태는 달라지지 않더라는 이야기이다.
갑질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기업인들도 주정순 씨의 말마따나 권력 앞에서는 늘 뜯기기만 하는 피지배 세력에 불과하다. 물론 때로는 상납과 접대로 두둑한 대가를 얻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권력이 달라면 줘야 하고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기업인의 숙명이다. 안 그랬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정권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거나 세무조사로 쑥대밭이 된 대기업의 비사(秘史)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최고 권력자에게 뇌물을 줬다는 혐의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재판이 25일 오후에 열린다. 핵심은 돈을 건네며 대가를 요구했는지의 여부이다. 사법부는 증거에 근거해 냉철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다만 ‘법알못(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보통 사람으로서 상식적으로 한번 판단해 보자.
어느 날 대통령이 따로 조용히 보자며 불렀다. 만나보니 돈을 달라고 한다. 아버지가 쓰러져 의식불명인 집안의 장남이며, 다국적 자본의 공격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23만 명의 리더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재용 부회장의 뱃심이 얼마나 두둑한지는 알 수 없다. 대통령을 상대로, 그것도 21세기 권력을 1970년대처럼 휘두르려 했던 ‘불통령’과 마주 앉아 ‘딜(Deal)’을 시도할 만큼 강심장일지도 모른다.
혹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 저항하지 않았나? 글로벌 거대 기업 삼성이라면 가능하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자. 능력자인 우리는 왜 상사의 갑질에 저항하지 않는가? 때려치우면 그만이지 않나. 왜 전교 1등마저 일진에게 ‘삥’을 뜯기고 다니나? 전학 가 버리면 되는 것을.
잠시 30여 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본다. 1988년 국회에서는 ‘제5공화국 청문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6명의 기업인이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 고 최종현 당시 선경그룹(SK) 회장, 신격호 당시 롯데그룹 회장, 고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 구자경 당시 럭키금성그룹(LG) 회장, 고 조중훈 당시 한진그룹 회장 등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3년 버마 아웅산 폭발사고 유가족을 지원한다며 ‘일해재단’이라는 공익법인을 만들었고, 재벌들부터 600억 원에 달하는 기금을 거둬들였다. “왜 돈을 건넸느냐”, “얼마를 준 거냐”는 의원들의 질타에 당시 정주영 회장은 “대통령이 달라고 해서 줬다. 그냥 달라는 대로 줘서 얼마인지도 모른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30여 년 후, 이들 6명의 총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아들이 같은 이유로 같은 자리에 서는 기막힌 광경을 지켜봤다. 권력자와 재단 이름 정도가 바뀌었을 뿐이다. 2016년 12월 6일,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린 날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일해재단에 돈을 건넨 총수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불가항력적인 강압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 것으로 볼지, 기업인들을 봐줬기 때문으로 생각할지는 각자 판단이지만, ‘삥’ 뜯긴 쪽은 그나마 덜 억울했을 일이다.
‘세기의 재판’을 하루 앞둔 오늘, 장원의 안주인 주정순 씨가 남긴 거침없던 한마디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얻어먹고 유세 떠는 놈은 계속 바뀌는데, 밥값 내고 고개 숙이는 쪽은 맨날 그대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