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슨이 26년 전 멕시코에서 근무할 때 슬림은 멘토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AT&T가 지난 2014년 말 멕시코 이동통신시장에 진출해 슬림의 아메리카모빌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면서 둘의 돈독한 인연은 악연으로 변했다고 3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소개했다.
현재 슬림의 제국은 AT&T의 진출로 직격타를 맞고 있다. 멕시코 최대 통신업체 아메리카모빌은 AT&T의 진출 이후 시가총액이 80억 달러 이상 줄어들었다. 슬림의 재산은 약 100억 달러(약 11조 원) 줄어 세계 1위 부호 자리를 내놓게 됐다. AT&T가 적극적인 시장확장 전략을 펼치면서 아메리카모빌의 지위를 위태롭게 한 영향이다.
AT&T는 현재 멕시코 이동통신시장 점유율이 11%에 불과해 아메리카모빌의 65%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진출 수년 만에 570만 신규 가입자를 확보하는 등 무서운 기세를 펼치고 있다.
스티븐슨 CEO는 “분명히 슬림은 나의 멘토였다”며 “그러나 사적인 관계가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옳지도 적절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슬림은 “우리는 좋은 관계였으나 이제 서로 다른 쪽에 서 있다”고 한탄했다.
멕시코 연방통신기구의 루이스 알도 산체스 전략기획 조정관은 “지난 4년간 그 이전 20년 동안 보지 못했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5000만 이상의 소비자가 더 좋은 데이터 요금제와 함께 스마트폰을 업그레이드하면서 2012년보다 절반 미만의 요금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AT&T의 진출로 독점 상태였던 멕시코 시장의 판도가 변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스티븐슨은 “슬림은 시장 경쟁은 물론 규제와 입법 등 정부, 의회와의 일을 다루는 데 매우 능숙하다”며 “아메리카모빌로부터 쉽게 점유율을 빼앗을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앞으로 수년 안에 AT&T가 2위인 스페인의 텔레포니카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독립 애널리스트인 케빈 로는 “아메리카모빌은 AT&T와 같은 경쟁자와 직면한 적이 없다”며 “AT&T는 작고 민첩한 도전자로서 많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말했다.
스티븐슨은 슬림과의 첫 번째 만남에 대해 “멕시코시티의 회의실에서 슬림은 지출 확대를 요청했다”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우리의 수치를 줄줄 말했다. 그는 우리를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수년에 걸쳐 스티븐슨은 슬림이 사업을 하는 방식이나 멕시코 시장의 관습 등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멕시코 정부가 1994년 페소화를 평가절하하면서 하루 아침에 화폐 가치가 절반으로 폭락했다. 당시 슬림의 회사는 설비 비용을 대부분 달러로 결제해 절박한 위기에 놓였다. 슬림 회장은 즉각 대차대조표를 꺼내들고 신속하고 극적으로 지출을 감축하는 방안을 그려나갔다. 스티븐슨은 “이런 상황에서 더욱 대담하고 단호하며 신속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 후 AT&T는 멕시코 시장에서 철수했으나 지난 2014년 현지 3,4위 이동통신업체인 유사셀과 넥스텔멕시코를 44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재진출했다. 그 다음 해 두 회사를 AT&T멕시코라는 이름으로 합병했으며 이후 가입자 수는 이전보다 60% 늘어난 1380만 명에 이르게 됐다. 이런 극적인 성장 배후에는 슬림으로부터 멕시코 시장을 배운 스티븐슨이 있다고 WSJ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