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방위적인 관세 폭탄을 추진하면서 자유무역 체제의 기둥 역할을 해온 세계무역기구(WTO)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간) 수입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36년 만에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내 들며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이례적인 수입 제한 조치를 예고한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례 없는 무역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 WTO 질서에 금이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WTO는 미국이 주도한 다자간 무역체제로 1955년 설립됐다. 오랜 기간 WTO에서 미국은 리더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가 WTO 체제에 역행하는 조처를 이어가자 유럽과 중국도 즉각 맞대응을 예고했다.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EU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할 것”이라며 미국을 WTO에 제소할 것임을 시사했다.
미즈호종합연구소의 야스이 아키히코 연구 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과 알루미늄의 관세를 대폭 인상할 경우 글로벌 무역 시스템이 큰 타격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안보를 이유로 수입 제한을 단행하는 것은 WTO 규범에 어긋나는 조처로 매우 나쁜 전례를 만드는 것”이라며 “각국이 WTO를 거치지 않고 직접 무역 보복에 나서면 WTO의 권위가 요동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키히코 부장은 미국 경제에도 이번 조처가 악영향을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수입 철강 제품 가격이 오르면 철강을 재료로 쓰는 자동차 산업이 영향을 받을 것이고, 제품 가격 상승으로 인한 부담을 소비자가 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이와종합연구소의 가네코 미노루 수석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미국 내 철강 산업이 활성화될 수는 있으나 철강 제품을 주재료로 쓰는 자동차 산업에서 타격이 있을 수 있다”고 관측했다.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미국의 산업 경쟁력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안보를 이유로 한 수입 제한 조치가 미국에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노루 연구원은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WTO가 미국의 이번 조처를 협정 위반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고 점쳤다. 또 “미국 산업에 악영향이 뚜렷해지면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는 수입 제한 대상국을 수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는 13일에는 미 펜실베이니아 주 연방하원 보궐선거가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에는 철강 도시로 알려진 피츠버그가 속해 있다. 이 지역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손을 들어준 대표적인 표밭으로 철강 산업과 관련한 유권자만 1만7000명에 이른다. 트럼프가 이를 의식해 철강·알루미늄 수입 규제 조치를 앞당겼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동시에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노리고 관련 산업 노동자들에게 큰 선물 안겨준 것으로도 풀이된다.
한편 미국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로 구성된 단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은 지난 1일 수입 제한에 대해 “미국의 경제, 기업, 노동자, 소비자를 해치는 행위를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의 조슈아 불턴 회장은 4일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전쟁을 쉽고 이길 만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며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서는 아무도 무역 전쟁의 승자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