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 고리는 대기업이 그룹 안에서 A사가 B사의 지분을, B사가 C사의 지분을, C사가 A사의 지분을 보유하는 방식이다. 대주주는 A사의 지분만으로 연결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정부는 ‘재벌 개혁’을 내세우며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주문했다. 지난 4월 삼성SDI는 삼성물산 주식 404만 주를 전량 블록딜 방식으로 매각해 3개 순환출자 고리를 끊었다. 남은 4개의 순환출자 고리는 삼성화재와 삼성전기의 보유 지분이 모두 팔리면 해소된다.
재계 및 증권가에선 애초 삼성이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삼성물산에 대한 지배력 유지를 위해 이재용 부회장 등 오너 일가가 사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삼성은 그러나 기관투자자에게 파는 정공법을 택했다. 오너 일가 지배력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이 부회장의 강한 의지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 지분을 사들이거나, 타 계열사 및 공익재단이 매입하는 방식은 지배구조를 둘러싼 또 다른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부회장은 경영자로서 지분 몇 퍼센트 늘리는 것보다 경영 능력을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이 부회장은 출소 후 삼성전자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는데, 그 연장 선상으로 풀이된다. 총수가 개별 회사 경영권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번에 처분된 삼성물산 지분이 3.98%로 크지 않은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블록딜이 지난 18일 방북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돌아온 20일 이뤄져 시점도 좋았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재계 관계자는 “대법원 재판에 대한 불확실성은 있지만, 최근 대북 활동 등 좋아진 대외 이미지를 고려해 순환출자 해소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순환출자 고리는 해소됐지만,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처리가 핵심인 금산분리 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전날 인터넷 전문은행법 국회 본회의 통과 등 금산분리 완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아직은 꽁꽁 묶여있는 상황이다.
국회에 계류된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에 따르면 금융사가 같은 금융사 외에 다른 기업 지분 10%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제조업인 삼성전자의 지분을 10% 이상 소유할 수 없지만, 현재 보유 지분은 10%가 넘는다. 최근에는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지주사 전환 가능성마저 사실상 막혔다.
국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 내년 7월 도입 예정인 금융계열사 통합 감독 등도 삼성 지배구조 개편에 발목을 잡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지주사를 만들 수도 없고, 금산분리에 보험법까지 걸려 있어 지배구조 개편 의지가 있어도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