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의 햇살과 바람] 정이 통하는 아름다운 한글

입력 2018-10-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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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노벨문학상을 받은 르 클레지오는 한국에서도 오래 산 셈이다. “안녕하세요?” 혹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썼는데 어느 기자가 한국말 중 어느 말이 가장 좋으냐는 질문에 클레지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이 단어는 그 어떤 나라 말로도 번역이 어려운데 매우 오묘하고 독특하다.” 그러면서 그는 정(情)을 이야기했다.

정은 응집력과 단결력이 함께 호흡하는 정서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랑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경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탐욕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결코 떼어 놓고 싶지 않고 오래 머물고 싶은 그 정에 대해 외국인도 경탄한 것이다. 한국을 알려고 노력한 작가인데 한국에 정이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랑은 첫눈에도 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하지만 정은 시간의 축적 안에서 우러나오는 은은한 맛이라고 생각한다. 정도 첫눈에 공감을 자아내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은 같은 처지를 단숨에 받아들여 공감대를 이루는 감정 상태에 쉽게 빠지는데 어머니 없이 혼자 궁핍하고 어렵게 살았다고 하면 “나도” 하면서 순간 정을 통할 수도 있다. 마음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통한다고 표현하지 않지만 정은 통한다고 말해 왔던 것이다.

오래 함께 산 강아지와 고양이에게서도 밀착되게 산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정인 것이다. 고향을 떠나며 뒤돌아보거나 별말 없이 보냈지만 살던 집을 떠날 때 왠지 좌우를 둘러보게 되는 것이 정 아니겠는가. 정은 이해타산을 뒤로하고 마음으로 건네고 마음으로 끄덕이는 말없는 목도리 같은 것이다. “정 때문에…”라고 하면 어떤 핵에너지보다 힘이 강해진다. 보이지는 않지만 폭발력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선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 가장 큰 욕이다. 인간관계에서 이해타산만 밝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가.

정분(情分) 났다고 하는 말도 좋다. 연분홍빛 분위기가 감돈다. 꽃향기가 돈다. 사귀어서 정이 났다는 뜻이지만 요즘말로 ‘썸탄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리라. 썸이 밖으로 기류가 흐르는 것이라면 정은 안으로 스며 배어드는 것이다.

며칠 전 제자 하나가 ‘갑분싸’라는 말을 해서 내가 화를 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진다’는 뜻이라는데 그 말 하나 줄여 남는 시간을 도무지 어디에 쓸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부정적인 말로 아름다운 우리말의 질을 떨어뜨려선 안 될 것이다.

최근 우리 한글의 새로운 부활을 보게 되었다. 홍대 앞이나 가로수길은 젊은이들의 거리다. 간판과 로고 표기가 거의 영어나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많던 영어 표기가 한글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정원’이라고 하면 손님이 없고 ‘가든’이라고 고쳤더니 손님이 많아졌다는 것은 오래된 고전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은 한글의 거리로 완연히 새롭게 옷을 갈아입었다. ‘짧은 여행의 기록’ ‘달콤사롱’ ‘안녕 낯선 사람’ ‘엉뚱 상상’ ‘물고기’ ‘몽마르뜨 언덕 위 은하수다방’ 등 재치 있고 산뜻하게 한글로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 있다.

하긴 한글의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한때 스스로 겸양인지 열등감인지 한글을 뒤로 숨기고 남의 나라 글을 앞세워 살았지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해야 하나, 젊은이들이 저절로 깨쳐 자신을 사랑하는 자세를 보니 거리를 걸으면서 왠지 자존감이 솟고 흥겨웠다.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말을 화가 날 정도로 훼손해서 말을 깨부수는가 하면 엉뚱할 만큼 줄여 사용하는 것이 마음 아팠었다.

한글날을 지나면서 간판이나 로고를 더욱더 관심 있게 바라보니 세종대왕께서 한때 구겨졌던 시름을 펴는 듯 미소를 띠는 듯했다. 나는 어질다, 사로잡다, 사무치다, 사랑, 아내라는 단어가 다 좋지만 정(情)보다는 약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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