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침공에 맞서던 송은 인구 6000만 명에 정규군만 160만이었고, 이미 화약을 발명해 화포 등 막강한 무기체계까지 갖춘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1235년에 시작된 몽골의 송나라 정벌은 40여년이 흐른 1272년이 되도록 성과가 없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전쟁의 승패는 두 나라의 외국인 정책에서 갈렸다. 한족 우월주의와 중화사상에 사로잡혔던 송나라와 달리 몽골은 항복하면 종족도 종교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군이 늘어갔다.
멸망한 여진족의 용맹함을 보태고 바다건너 페르시아의 과학을 더하자 오직 한족의 근육과 두뇌에 기댄 송은 더는 버티지 못했다. 쿠빌라이 칸이 친히 모셔온 일한국 출신 무슬림 기술자들이 만든 신형 투석기 회회포에서 100Kg 짜리 바위가 날아들자 굳건하던 번성의 성벽은 깨강정이 돼 흩어졌다. 곧 이어 양양성, 남경의 문이 활짝 열렸고 송의 수도 임안이 칸의 손에 떨어졌다. 1279년 소제가 바다에 몸을 던지면서 송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원나라 시대가 열렸다.
입술이 없어져 이가 시리기 시작한 고려는 송이 걸었던 민족주의를 답습하는 패착을 두고 만다. 최씨 무신정권은 ‘단일 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대몽골 저항의식 고취에 나섰다. 단군 할아버지가 처음 등장하고 고구려의 영웅서사시가 인기를 얻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난리 통에 서술된 것은 “오랑캐에 맞서 싸우라”는 선동적 국뽕이었다고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결과는 여진족 이탈을 불렀던 송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다. 북방을 지탱하던 기둥인 거란족, 말갈족을 필두로 고려에는 무려 20만 명이나 되는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갑자기 ‘단군의 자손’임을 선언하며 사생아 취급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당시 고려의 인구는 200만 명, 10%의 잠재 병력을 스스로 잃고 시작한 전쟁은 알다시피 단군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랑캐와 혈연관계를 맺는 모순으로 끝났다.
몽골 왕족과 혼인한 최씨 등 고려의 무신정권과 왕족들은 여전히 단군의 후손인가. 그렇다면 실례지만 어디 최씨인가? 울란바토르 최씨인가? 개경 최씨인가?
정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는 총 5582개에 달한다. 이 중 한반도에서 유래된 토종 성은 270개로 5%도 되지 않는다. 최근 새롭게 성씨로 등재돼 한자로는 쓸 수 없는 성도 4075개나 된다.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 화산 이씨, 경주 김씨, 김해 허씨, 덕수 장씨(배우 장동건 쌍꺼풀의 비밀) 등 단군 할아버지나 웅녀 얼굴 한 번 못 본 명문가도 차고 넘친다. 민족이니 국민이니 하는 말은 모두 일본에서 유래했으며, 순 우리말이라는 ‘겨레’도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이 20세기에 만들어낸 신조어일 뿐이다. 단일 민족 신화는 조선의 사대주의와 일제의 내선일체라는 협잡질에 이용됐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한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은 ‘단일민족’을 이렇게 평했다. “중국의 한족은 우리를 동이로 분류했는데 여기에는 말갈·몽골·숙신·선비족 등이 모두 속해 있었다. 조선 후기 극단적인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다른 동이족을 오랑캐로 몰면서 우리를 한족과 같다고 주장한 것이 소중화 사상이다. 여기에서 허구적인 단일민족론이 나왔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다민족 사회였고, 동이족 사이에는 언어도 서로 소통되었다.”
목숨 걸고 반군을 비판한 예멘인이 난민으로 인정받고, 불길 속 할머니를 구한 스리랑카인에 영주권이 주어졌다. 흥선대원군이 넘쳐나는 이 땅에 단군쿠빌라이의 DNA를 이어갈 후손들이다.(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4명 중 1명에게서 몽골인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한다.) 민족이 어딨으며 외국인이 대수인가. 외계인도 이 땅에 와서 살면 우리나라여야 한다. 싫다는 외계인은 납치한 뒤 고문해서 세상 신기한 기술이라도 얻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