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이사회 권한은 막강하다. 예컨대 관계 회사 간 M&A나 거래 시 미국은 이해관계가 없는 ‘특별위원회나 다른 주주의 승인’이 필요하고 영국의 경우 ‘주총 승인’ 또는 이해당사자의 ‘의결권의 제한’을 받는다. 중국도 자본 조달, 채권 발행, 대규모 투자, 이해관계자 간의 거래 등 회사와 주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을 주총에서 결정한다. 이에 비해 한국은 중요 자산의 처분, 대규모 자금 차입과 유상증자, 그룹 내 이해관계가 있는 회사 간의 거래들을 대부분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독일이나 일본처럼 ‘이사의 책임’만 물을 수 있을 뿐이다. 그만큼 이사회의 권한과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투명한 책임 장치가 더욱 중요하다.
이사회에는 기능을 보다 전문화하기 위해 각종 소위원회를 둔다. 회사 내부 사정과 사업 지식이 우선될 경우 사내이사의 비중을 늘리고, 감독 기능이 중시될 경우 사외이사 위주로 구성한다. 본질상 사외이사 본연의 역할이 ‘경영진 견제’에 있기 때문이다. 독립성을 바탕으로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사업상의 의사결정’을 객관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핵심이다. 필요한 경우 각종 ‘대외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우리의 현실을 짚어보자. 대신지배구조연구소의 분석에 의하면, 2018년 30대 그룹 소속 상장기업 중 감독기관, 사법기관, 장·차관 등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의 비중은 36.4%에 달했다. 특히 최근 면세점 특혜 논란이 있었던 롯데그룹의 경우 신규 및 재선임 사외이사의 100%가 권력기관 출신이었다. 이사회 본연의 기능보다는 대관 업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다고 보일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하면 2018년 기준 소위원회 중 내부거래위원회가 35.6%로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사외이사의 이사회 출석률도 95.3%로 매우 양호한 모습이다.
문제는 실질적 운영이다. 2018년 기준 이사회의 안건 처리 현황을 보면 사외이사가 안건에 영향력을 행사한 비율은 0.3%, 부결 비율은 0.1%로 나타났다. 1000개의 이사회 안건 중 회사와 이견이 있는 것이 3건에 불과하고, 부결된 안건은 단 1건이란 의미다. 특히 총수가 있는 집단의 기업 내 부결된 안건은 0건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국의 특성상 빈도가 많고 ‘경영권 승계의 새로운 공식’으로 정착된 대규모 내부거래 안건이다. 56개 대기업집단 내 253개 상장사 중 부결된 안건이 단 하나도 없다. 내부거래를 수의계약으로 줄 때 그 사유가 기재되지 않은 안건 또한 81.7%에 이른다. 안건 내용의 부실함도 이사회 본연의 기능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다. 회사에 중대한 문제가 생길 경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누구의 책임인지, 과연 법의 취지대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이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법적으로 이사의 책임을 얼마나 물을까. 경제개혁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1997~2017년 주주대표 소송 건수는 47건이었다. 1800여 개의 상장사가 존재하며, 신규 진입 및 퇴출이 반복되는 자본시장의 현실까지 고려하면 연평균 2.2건은 매우 적다. 미국에서는 사외이사가 되면 그 막중한 책임감과 소송의 위험 때문에 재산부터 부인에게 옮겨 놓는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갯소리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부여된 강력한 권한에 비례하는 책임을 지우려면 그에 합당한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 이사의 선임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사회의 세부위원회 구성과 구체적 활동 내역 등 이사회 전반에 대해 상세한 모니터링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