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속으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입력 2019-05-08 17:45 수정 2019-05-0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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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이번 칼럼은 돈보다 세상 이야기다. 밥 한 끼 얻어먹는 ‘한끼줍쇼’에 서울 여의도 아파트가 나왔고, 필자는 한 장면에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았다. 여의도 아파트는 초창기 도시 개발 때의 아파트가 대부분이어서 낡고 오래됐다. 개그맨 김수용이 보여준 그가 살던 옛날 아파트도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거실에 라디에이터가 있고, 부엌 옆에는 이름도 생소한 ‘식모방’이 있다. 지금의 가사도우미를 그때는 ‘식모’라고 불렀다. 1970·80년대에는 집에 식모방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시골 처녀들은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했다. 노동력이 풍부했고, 인건비가 쌌던 그 시절의 엄마, 누나, 언니들은 열심히 일해서 그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능했던 시대이다. 그러나 그 시대는 불안하고, 불안정했다.

지금의 시대를 ‘헬조선’이라고 한다. ‘식모’라는 직업은 없어지고, 계층 간의 상향 이동도 어려워졌다. 돈은 벌지만 계층 이동은 멈춰버린 사회이다. ‘헬조선’의 실체는 한국이 성장을 멈춰버린 데에 있다. 불안정한 1970·80년대에는 공부를 하면 검사, 의사가 되고 식모살이를 했던 사람들이 중년이 되어 안정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고 계층 간의 질서가 안정되어버린 지금은 공부를 부모보다 열심히 해도 힘들고, 돈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뛰어도 가난하다. 한국이 더 이상 역동적이지 않기에 생긴 좌절이다. 여기서 묻고 싶다. 1970년대로 돌아가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적응할 것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승자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적응한 이만 살아남았다.

대학을 예로 들어보자. 1970년대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면 기회가 많았다. 경제의 고속성장이 첫 번째 이유였지만, 대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이 지금만큼 많지 않았던 것도 주요한 배경이다. 실제 당시 중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이들의 선택지에는 상업고등학교나 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가기보다 은행에 취직하고, 철도회사에 취직해 평생 직장을 삼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에 자리 잡은 후 아쉬움은 커져만 갔을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며 야간 대학이라도 가고, 누나는 남의 집 살이를 살면서 장남을 뒷바라지하고, 부모는 소를 팔아 자식의 공부에 헌신적으로 매달렸다. 그런 밑거름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성장기의 기둥들은 쭉쭉 뻗었다.

성장이 멈췄고,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 옛날에는 대학도 가고,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고등학생이 대학을 가려고 공부한다. 1970·80년대의 대학은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필수다.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구하기 힘들어진 이유이다. 헬조선의 젊은이들은 그 시절의 젊은이를 부러워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사회는 변화한다. 그 상황이 다를 뿐이다. 청년들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불안한 그 시대를 살지 않았다. 지금도 기회는 다가온다. 달라진 사회 상황을 인지하고 적응해서 앞에 놓인 선택지를 직시해야 한다.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해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화로 나서기 시작한 때가 1970년대이다. 창원에 기계공단이 생기고, 여천에 석유화학공단, 구미에 전자공단이 정부 정책에 힘입어 자리 잡았다. 일자리가 늘어나자, 주변에 도시도 성장하고, 자영업도 커지고, 땅부자도 출현했다. 뭐든 열심히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노동을 싸게 활용해 생산성을 올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본주의는 투입 대비 이윤이 남아야 증식되는 구조이다.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해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은 결국 저임금의 노동자에 의존했던 것이다. 농경사회의 생산이 노동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산업자본기의 생산은 자본이 노동을 포획하여 자본의 생산성을 높여 간 기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본의 생산성이 예전 같지 않다. 정부 정책과 발맞춰 성장해 온 산업자본은 새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일자리는 자본이 만드는 것이고, 자본이 부가가치를 창출할 때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자본을 투입해도 그만큼 자본 생산성이 개선되기 힘들다. 한국의 주력 산업은 공급 과잉과 경쟁 격화에 노출돼 있다. 기업이 설비투자를 늘린다고 생산성 증가로 연결되기 쉽지 않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이미 0%대로 감소했고, 2020년 이후에는 마이너스 영역으로 들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노동과 자본에 의존한 수확체감의 세계에서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는 수확체증의 경제로 진화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러한 변화를 선도하며, 주가도 사상 최고치를 넘어 전진하고 있다. 아마존과 구글이 수확체증 경제를 현실에 구현하고 있고, 정부는 감세와 규제완화로 이러한 기업들의 자본 생산성 개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면, 우리가 처한 현실은 매우 암울하다. 여전히 정책의 주안점은 노동과 자본이라는 전통적 생산요소에 머물러 있다. 자본 종시를 죄악시하는 일종의 성장 염세주의가 만연하다. 청년들이 과거 세대를 부러워하며 선택한 현실이 ‘공시’라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9급 공무원의 평균 경쟁률은 ‘40대 1’에 육박한다. 안정과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현실이 안타깝다. 공무원이 청년들의 합리적 선택인 상황에서 규제 완화와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청년들의 선택지가 바뀌어야 한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기에 그랬던 것처럼,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기에 적응해야 한다. 2000년 초반 IT혁명기에 새로운 기술은 이미 다 나와 있다. 기술을 개발한 이가, 아니 기술을 활용한 이가 돈을 버는 세상이다. 스트리밍 기술을 개발한 이보다 그 서비스를 적용한 넷플릭스가 혁신의 주인공이 됐다. 노동시간의 감소는 기계와 새로운 형태의 혁신이 대체해 갈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에 필요한 인재는 부족하고, 과거의 일에 머물러 있는 일자리 감소는 가속화할 것이다. 정부든 기업이든 시차를 두고 세상의 변화에 따라갈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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