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휴식이 있는 삶을 보장하기 위한 국정과제로, 노동시간을 주 최대 52시간으로 단축하고 26개 특례업종을 5개로 축소하는 내용으로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2018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에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도 11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한다는 공문이 통지되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연구현장에서는 근무(연구)시간에 대한 불편을 토로하는 연구자들을 흔하게 만나게 된다. 연구에 몰두하다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 일단 퇴근 카드를 찍고 난 후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서 하던 연구를 계속하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주도로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수천억 원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에서 연구개발에 소요되는 시간을 정하고 이를 지키도록 통제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무 거리낌 없이 벌어지고 있다.
연구현장은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적어도 지속성이 요구되는 연구개발 업무에 있어서 주 52시간 이상 일을 하겠다는 연구자를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정책이 오히려 연구자들의 일할 권리를 빼앗아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 확보에 득이 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물론 근로시간을 줄여서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자는 주 52시간제는 바람직한 방향이겠지만, 아무리 선의로 수립된 정책이라 하더라도 현장을 무시한 정책은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26개 특례업종을 5개로 축소하는 과정에서 연구개발업을 제외시킨 것은 현장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업무의 특수성이 고려되지 않은 일률적 적용, 통제와 감독으로 과연 경쟁력 있는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위한 정책인지 다시 한번 신중하게 검토하고, 적절치 못한 정책이라고 판단되면 무조건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개선해야 한다.
정책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연구현장의 자율성 보장을 주장했던 정부가 말하는 자율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필자가 정부출연연구소에 근무하던 당시, 한때 불 꺼진 연구현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 정시 퇴근 연구자들이 괜스레 죄스러움을 느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현장에서는 특성상 시간을 조정하면서 할 수 있는 연구도 있으나, 초전도자석을 만든다든가 생체실험을 한다든가 여러 날 밤을 새워가며 진행해야 하는 연구도 있다. 물론 인력이 풍부하다면 지속성이 필요한 연구 수행을 위하여 교대근무제를 활용함으로써 주 52시간 근무 규정을 지킬 수도 있겠지만, 인력 등 소프트웨어 투자에 인색한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4차 산업혁명 대정부 권고안’을 언론에 설명하는 자리에서 “인재는 시간이 아닌 성과로 평가받고, 도전을 통해 차별화된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던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 장병규 위원장의 말에 적극 공감하며,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과학기술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일률적인 주 52시간제 적용은 재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