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에 작년 체결된 ‘9·19 군사합의’를 대놓고 깬 것이다. 해안포를 발사한 곳은 포사격이나 야외 기동훈련 등 상호 적대행위를 않기로 한 ‘해상완충구역’이다. 우리 군은 이 사실을 숨기다 뒤늦게 북측에 항의했다.
2018년 9월 19일 평양의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비핵화와 군사 충돌 방지, 경제협력 등의 합의를 담은 공동선언을 내놓았다. 여기서 군사분야 부속합의서가 채택됐다. 남북이 지상과 해상, 공중 등 모든 공간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내용이다. 육상의 군사분계선 5㎞ 안, 해상은 서해 남측 덕적도 이북에서 북측 초도 이남 수역 내의 포사격 및 기동훈련이 금지됐고, 군사분계선 상공도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북의 적대행위가 멈췄는가? 북은 긴장을 고조시키는 도발을 거듭했다. 올 들어서만 초대형 방사포와 미사일을 10여 차례 발사했다. 남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파괴력이 큰 무기다. 10월에는 기존 방어체계를 무력화하는 공포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까지 쏘아 올렸다. 이번 해안포 도발에 대한 항의를 비웃듯, 북은 다시 11월 28일 초대형 방사포 발사 시험을 했다. 연내 핵실험을 재개하거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우리만 군사합의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스스로 손발을 묶었다.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축소, 해안포 사격훈련 및 공중 감시전력 기동 중단 등으로 대북 감시 및 대응 역량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지금 남쪽 접경지역은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다.
군사합의는 사문화(死文化)됐다. 북은 늘상 그랬다. 남북 간 합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국제사회와의 약속도 속임수로 일관했다. 비핵화가 대표적이다. 처음 남한 노태우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이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한 게 1991년이다. 그런데 북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 개발을 선언했다. 2003년 6자 회담이 시작되고, 2005년 북의 핵 폐기와 NPT 복귀에 합의한 ‘9·19 공동성명’이 나왔다. 하지만 북이 검증을 거부해 무력화됐다. 북은 결국 2006년 핵실험을 시작했고, 2007년 핵시설 폐쇄와 불능화, 핵프로그램 신고를 이행하는 6자 회담의 ‘2·13 합의’와 ‘10·3 합의’가 이뤄진다. 또다시 휴지조각이었다. 북이 약속을 깬 뒤 핵무기를 완성해 여섯 차례 실험으로 고도화하는 동안, 한국과 국제사회는 막대한 돈만 뜯겼다.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북핵의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 신세가 됐다.
이제 북은 비핵화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핵을 가진 나라가 스스로 포기한 전례도 없다. 북·미 협상도 별 희망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재선 전략으로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이라는 이벤트에만 관심 있지, 핵 문제 해결의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다. 해법이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나,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 얘기는 쑥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만나도 핵 동결과 시설 일부의 검증되지 않는 폐기와 사찰 수준에 그치고, 대북 제재가 풀리는 최악의 결론일 공산이 크다. 문 대통령은 적극 환영할 것이다. 그리고 북은 당연하다는 듯 모든 청구서를 우리 쪽에 내밀 게 틀림없다.
결국 북핵의 치명적 현실은 그대로인 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고, 문제 해결의 답도 없고, 우리는 그들의 협박을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처지로 가고 있다. 한·미 동맹도 트럼프의 천박한 장삿속에 신뢰와 가치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 안보의 기댈 곳이 없어진다. 그런데도 자꾸 거짓 평화를 좇는다. kunny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