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화학 업종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지난 11일 LG화학은 신용등급이 ‘A-’에서 ‘BBB+’로 하향 조정되는 수모를 겪었다. 공격적인 재무정책으로 인한 차입금 증가 전망(2020년 8조 5000억 원)와 재무부담 확대, 석유화학 업황 둔화가 발목을 잡았다. 지난 2일 SK이노베이션도 3년여 만에 국제금융시장에서 신용등급이 ‘BBB+’에서 ‘BBB’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 기업들은 지난 3년여 동안 차입금을 감축해 왔지만 최근의 무역분쟁 심화, 기업들의 공격적인 재무정책, 규제위험 등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7월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밝힌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무디스를 포함해 S&P와 피치 등이 잇따라 2020년 한국경제와 기업에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당장은 경고장이지만 한국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특히 기업들은 수출길과 자금 조달 길이 막힐까 좌불안석이다. 신용등급에 민감한 글로벌 자금시장에선 이들을 ‘추락한 천사(fallen angel)’라 부른다.
◇석유화학 등 7개 업종 실적 저하, 무더기 강등 우려=12일 무디스 S&P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에 따르면 2020년 한국 기업들이 ‘신용 리스크’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
무디스가 평가하는 총 24개 한국 민간기업(금융사·공기업 제외) 가운데 절반 이상인 14개 기업의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이다. 이들 기업의 향후 신용등급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크리스 박 무디스 기업평가 담당 이사는 “전반적인 글로벌 경기 둔화와 무역 분쟁의 지속으로 한국 수출 기업들의 올해 수익성이 악화됐고, 내년에 일부 개선될 여지는 있으나 개선 폭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특히 미·중 무역분쟁의 지속으로 화학, 테크놀로지 업종이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라며 “철강, 화학, 정유 쪽은 경기 둔화와 업황 부진의 영향으로 수익성이 안 좋다”고 진단했다.
S&P와 함께 최근 미디어 간담회를 연 나이스신용평가도 내년에 국내 40개 산업부문 중 17개 부문의 사업 환경이 나빠질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소매유통과 디스플레이·석유화학 등 7개 업종은 실적 저하를 예상했다. 자동차ㆍ조선과 금융 등 나머지 33개 업종 전망도 현상 유지 정도였다.
국내 신용평가 3사도 비슷한 평가를 한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등급 전망이 있는 43개 기업 중 30곳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도 각각 37개사(평가 대상 56개 사 중), 27개사(50개 사)를 ‘부정적’대상에 올려놨다.
등급 조정도 빨라졌다. 현대자동차의 신용도가 최근 ‘AAA+’에서 ‘AA+’로 하향 조정되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투자증권 김기명 연구원은 “현재 ‘부정적’ 꼬리표를 단 기업들은 실적이나 재무구조가 확연하게 좋아지지 않으면 실제 등급 하향이 과거보다 빨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사이클 반등 등 긍정적 신호도=기업들이 당장 ‘추락 천사’로 전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느리지만 회복세가 전망되기 때문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내년 국내 상장사들의 예상 영업이익은 168조8398억 원으로 올해 보다 27.29%늘어날 전망이다. 숀 로치 S&P 아태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전무)는 이달 초 열린 미디어 간담회에서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양적 완화, 미국과 중국의 부분적인 무역 합의 가능성, 전자 업종의 재고 사이클 반등세 등에 힘입어 한국 경기는 내년에 반등할 것”이라고 밝혔다. JP모건도 “내년에는 세계 제조업 및 설비투자(capex) 사이클이 다소 회복될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한다”며 “미·중 간 무역 긴장 역시 실질적으로 더는 고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국의 대외 수요 감소에 있어 최악의 장애물은 지나갔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S&P는 ‘높아지는 신용 위험에 직면한 한국 기업들’ 보고서에서 한국기업 신용의 걸림돌로 △ 험난한 영업 환경 △공격적 재무정책 △규제 리스크를 꼽았다.
‘느리게 가는 자전거(한국 기업)’를 밀고 끌어줄 대책은 있을까.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대내외 경기하방 리스크 속에서 경기회복력을 강화해 더블딥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며 “정부와 지자체는 올해 남은 기간 불용액을 최소화하고 2020년 상반기 중 조기 집행률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