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횡령·뇌물 혐의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내준 세 가지 ‘숙제’ 마감 시한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이 부회장이 새해 경영 메시지로 ‘상생 성장’과 ‘잘못된 관행 폐기’를 던졌다.
이 부회장은 새해 첫 경영 행보로 2일 화성사업장 내에 있는 반도체연구소를 찾았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3나노 공정기술을 보고받고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사장단과 함께 차세대 반도체 전략을 논의했다.
이날 이 부회장은 “과거의 실적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역사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잘못된 관행과 사고는 과감히 폐기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이어 “우리 이웃, 우리 사회와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자 100년 기업에 이르는 길임을 명심하자”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메시지는 최근 삼성을 둘러싼 경영 불확실성 증대와 높아지는 사회적 책임 요구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이 부회장은 오는 17일 파기환송심 4회 공판기일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에서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재판 말미에 이례적으로 당부의 말을 전하며, △과감한 혁신 △내부 준법감시제도 △재벌체제 폐해 시정 등을 요구했다.
정 부장판사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 51세 이건희 총수는 낡고 썩은 관행을 버리고 사업의 질을 높이자며 이른바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 2019년 똑같이 만 51세가 된 이재용 삼성그룹 총수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합니까”라고 물으며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기업 내부 준법 감시제도’ 등 세 가지 숙제를 당부했다. 재계에서는 삼성 내부에서 각 사안에 대해 큰 가닥을 잡고 구체적인 실행내역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세 가지 당부 가운데 먼저 ‘과감한 혁신’과 관련해선 대규모 투자 발표 및 실행을 통한 초격차를 유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근 삼성전자는 중국 산시성 시안 반도체 공장에 80억 달러(약 9조5000억 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고, 삼성디스플레이는 중국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2025년까지 ‘QD디스플레이’ 생산시설 구축 및 연구개발(R&D)에 총 13조1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내부 준법감시제도’에 대한 준비도 거의 마무리했다. 삼성은 최근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외부인사 6명 내부 인사 1명으로 위원 선정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으며, 김지형(현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내정했다. 김 전 대법관은 진보성향 법조인으로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 조정위원장을 맡아 11년 동안 이어진 백혈병 논란을 2018년 잘 마무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벌체제 폐해 시정과 관련해선 사실상 무노조 경영을 포기했다. 법원은 삼성전자서비스의 노조와해 공작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 삼성그룹 계열사 전·현직 임직원들에 유죄를 선고했다.
삼성은 대국민 사과문을 내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과거 회사 내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앞으로는 임직원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 지향적이고 건강한 노사문화를 정립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재판부가 요구한 ‘이재용 삼성 총수의 선언’에 대해서는 사내외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삼성가(家) 롤모델로 알려진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의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 회장과 만나 양 사 간 협력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유럽 최대 규모 그룹 중 하나인 발렌베리그룹은 오너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대표 기업으로 꼽힌다. 이런 이유로 삼성은 그동안 발렌베리그룹의 기업 운영방식 등을 일부 벤치마킹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 역시 2003년 스웨덴 출장 때 발렌베리가를 방문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마르쿠스 회장에게 준법경영과 상생경영을 비롯해 국민에게 존경받는 기업이 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조언을 구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 부회장은 최근 추진하고 있는 삼성의 준법과 상생경영 관련한 혁신적 업그레이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