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지금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향하는 시민들 퇴근길에 전해야 할 소식인지 현타가 밀려든다.
문재인 대통령은 계속 남의 다리 긁는 정부를 “감수성이 의심스럽다”며 질타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청와대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대통령의 감수성에 의문이 생겨난다.
마스크 없다고 질타하는 자리에 마스크를 쓰고 등장한 대통령은 장관들에게 “마스크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라”고 했다. 그런데 1953년생인 문 대통령은 공적 마스크 구매가 가능한 날이던 11일 약국에 가지 않았다. 물론 문 대통령의 성정상 꼭 필요한 국민에게 자신의 마스크를 양보했을 것이다. 설마 돌팔매 날아들까 경호를 걱정한 것은 아닐 테고, 대통령이 제 먼저 살겠다고 약국 앞에 줄선 풍경도 모양 빠지는 일일 테다. 하지만 적어도 대통령이 나타날 약국에는 미리 마스크 깔아놓고 공급이 원활한 척이라도 할 테니 몇십 명이라도 망극한 성은을 입지 않았을까.
참모들을 통해 전달받은 국가 상황이 실제와 다름을 눈치챘다면, 그래서 “현장을 확인하고 오라”고 역정까지 내야 할 지경이라면 한 번쯤 스스로 나가 보는 것은 어떨지. 방역현장이나 마스크공장처럼 안 가는 게 도움인 곳 말고, 자신의 판단 실패로 인간다운 삶을 뺏긴 소시민들을 뼛속까지 확인할 수 있는 곳에 나타났으면 한다.
섬나라 왜구의 수작질이 그리 중한가. 관심 좀 달라는 김정은의 불꽃놀이에도 눈길이 가지 않는 판국에 침팬지 수준의 혐한 정치가 청와대까지 나서야 할 일인가. 혹시라도 혐한을 역이용해 총선 앞둔 국내 정치에 써먹을 셈법이라면 차라리 호연지기나 발휘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청와대의 유감 웅앵웅 대신 하급 관료가 나서 “와달라 빌어도 안 가니 니들 방역이나 신경 쓰세요. 시간 되면 방사능도 좀 치우고” 했다면 속이라도 후련했을 것을.
나이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며 지위 높다고 리더가 아니다. 먹은 게 나이뿐이라면 꼰대이고 죽창 들라 선동이나 해대면 보스일 뿐이다. 일본엔 부들부들, 북한·중국엔 살살 녹는 리더십으로는 국격이나 글로벌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유럽의 중세시대 영주들이 유독 높은 언덕에 성을 지은 까닭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서 지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다. 물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권위를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다. 그런데 첫째 목적인 전쟁에서의 지리적 우위는 반대로 영주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에서 보듯 전투가 불리해지면 성 안으로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 문을 굳게 닫고 농성에 들어가는데, 이렇게 되면 영주는 도망갈 길이 끊긴다. 성문이 뚫리면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고 영주는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고, 이때 전투가 끝나는 것이 원칙이었다. 나머지를 살려 둬야 새로 얻은 영지에서 세금을 걷을 수 있어서다.
어찌 보면 허망한 이 결말이 백성들이 충성과 세금을 바치는 이유였다고 한다. 유사시 성은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이며, 영주는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맨 앞에서 싸우다 죽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계급사회이면서 동시에 냉정한 계약사회였던 셈이다.
“마스크는 충분하다”더니, 일이 커지자 “사흘에 하나면 충분하다”며 태세전환한 대통령을 둔 입장에서 중세 영주의 계약사회가 부러우니 진 거다.
하긴, 우리가 언제 나라 덕에 이 정도라도 살았던가. “기다리라”는 말 믿었던 학생들의 희생 덕에 탄생한 정권이 또 “기다리라” 하니 이번에도 우린 알아서 살아낼 테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만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외국도 칭찬하는 방역시스템”이라며 미리부터 자화자찬하는 섣부름도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