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계가 혹한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중국, 인도 등 신흥국 경제의 고도성장과 최근 수년간 해운경기 호황으로 '호시절'을 구가했던 국내 조선업계가 세계 경기 침체를 비켜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해운업체들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조선업체와의 선박주문 계약을 취소하고 있어 국내 중소 조선업체에는 직격탄이 되고있다.
◆수주 '뚝뚝'…금융위기 직격탄
11일 한국조선공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6월 300만CGT(표준화물선 환산 t수)에 이르렀던 국내 조선업계 수주물량이 9월에는 70만CGT까지 급감했다.
특히 세계 조선업계 빅3인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의 지난달 수주 실적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경우 '0'을 기록했으며, 삼성중공업은 3척(10만CGT)을 수주하는 데 그쳤다.
이들 3업체의 지난해 10월 수주량이 18척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올해 실적은 전년 동기 대비 83%나 줄어든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 하락으로 물동량이 줄면서 새 선박 발주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조선·해운 시황 전문분석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2006년 6300만CGT에 이르렀던 세계 선박 발주량은 지난해 8700만CGT까지 치솟았다가 올 들어 지난달까지 3800만CGT에 머물고 있다.
선박 발주·수주량이 급감한 직접적 원인은 금융위기다. 조선공업협회 관계자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해운시장이 위축된 데다 선박 금융마저 얼어붙으면서 발주가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선주들은 선박을 발주할 때 선박금융을 끼고 들어간다. 배 1척당 가격이 1억~10억달러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세계 금융시장이 자금경색에 빠지면서 선박금융 소요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실제로 대우조선해양은 유럽선주로부터 컨테이너선 8척을 수주했으나 선주 측이 선수금을 입금하지 못해 지난 8월 계약이 해지됐다.
대우미포조선 역시 유럽소재 선주사로부터 PC선 4척을 수주했으나 선주가 선수금을 입금하지 못해 지난 7월 계약을 해지된 바 있다.
◆선박주문 계약 취소 잇달아
이와 함께 세계 경기침체로 선박 운임이 바닥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급락하면서 선주들이 선박주문을 꺼리고 있다.
특히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업체와의 선박주문 계약을 잇달아 취소하면서 중소 조선업체를 중심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는 철광석, 석탄, 밀 등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급감하면서 이를 운송하는 벌크선의 단기 운임지수인 BDI(발틱건화물운임지수)는 지난 5월20일 사상 최고치인 1만1793포인트를 기록했다가 지난 10일 820포인트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유가가 하락하면서 부담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현 운임수준으로는 적자 운항이 불가피한 상황인 만큼 무리하게 배를 늘리기보다 위약금을 물어주고 주문을 취소하는 편이 낫다는 것.
실제로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뉴욕증시에 상장된 해운업체 겐코는 지난주 5억3000만달러 상당의 배 6척의 제조 주문을 취소해 계약금 5300만달러를 몰수당했다.
헬레닉캐리어도 지난 7월 계약한 6억9700만달러 규모의 벌크선 주문을 취소해 697만 달러의 계약금을 몰수당했으며 추가로 100만 달러의 위약금을 지급해야 할 상황이다.
◆조선업계 양극화
세계 경기침체로 수주물량이 줄고, 선박주문 계약 취소가 잇따르면서 조선업계도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 지고 있다.
대형 조선업체들은 3~4년치 일감이 밀려 있어 경기 회복 때까지 버티면면 되지만 중소 조선업체들은 부도위기까지 내몰리며 '혹한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후죽순으로 조선 산업에 뛰어든 중소 조선업체의 구조조정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실제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C&중공업은 지난 8월부터 조업을 중단했다. 경남과 전남 해안지역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중소 조선업체들도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다.
중소업체들은 선박 수주를 먼저 받은 뒤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함께 진행하는데 금융권에서 대출을 기피하고, 기존 대출마저 회수하면서 조선소 건설 자체가 중단되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대형 조선사들은 최근 수주 감소가 경쟁력이 떨어져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물량 자체가 줄었기 때문인 만큼 경기가 살아나면 수주물량을 늘릴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며 "특히 고부가가치 선박에 집중돼 있어 불황 영향을 적게 탄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그러나 세계 경기가 회복세를 타기까지 2~3년은 걸린다고 봤을 때 조업중단, 선주의 수주물량 취소, 금융권 대출 기피 등 악재에 휩싸인 중소 조선업체들은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구조조정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편 조선업계 전문가들은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조선 시황이 조금씩 살아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경기침체 국면이 풀리고 중소 조선업체의 구조조정이 완료되는 내년 하반기께면 다시 조선 시황이 좋아질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