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왜 기다리는 것은 더디 오는가?

입력 2022-01-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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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새해를 기다리고, 팬데믹 시국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밤이 괴로운 사람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환자를 식구로 둔 이들은 가족 환자의 쾌유를 기다리며, 이력서를 낸 청년은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기다린다. 이렇듯 인간은 늘 무언가를 기다리며 사는 존재다. 그게 메시아이거나 연인이거나 일자리이거나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대상을 저 너머에 머물게 하는 장치다. 메시아는 저 너머 어딘가에 숨어 있고, 그의 도래가 늘 뒤로 미뤄진다.

기다림이 대상의 운둔 앞에서 무한한 흩어짐을 겪는 일이라면 기다림은 저 너머의 대상을 꼭꼭 싸매 숨기고 안 보이는 것의 아우라를 만든다. 결국 기다림이란 시간을 먹고 자라는 불가능함이고, 시간에 삼킴을 당하는 일이다. 기다리는 자와 대상 사이에는 근원적 거리가 있는데, 그리움과 노스탤지어가 생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기다림을 숭고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그 거리다. 우리는 기다림 안에서 존재의 흩어짐을 겪는다. 아마도 그게 우리가 겪는 최초의 실패이고, 절망일 것이다. 기다림은 대상과 주체의 객관적 거리를 무한으로 늘리고, 기다리는 자의 현실을 악몽과 우스꽝스러운 부조리극으로 바꾼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사진 연합뉴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사진 연합뉴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림 자체가 존재의 부조리임을 드러낸다.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른 채 ‘고도’를 기다린다. 두 부랑자는 그 기다림의 불확실성에 자기를 헌납한다. 기다리는 자들은 대상이 와야 할 자리에 먼저 가서 기다린다. 기다림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 명제다. 그들은 그 어떤 의심이나 의혹도 틈입할 수가 없는 기다림에 포박된 채 꼼짝도 하지 못 한다. 그들은 기다림에 지친다. 애초에 기다릴 수 없는 대상, 아니 기다리지 말아야 할 대상을 기다린 것이 그들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결국 기다리는 자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기다림의 지체와 불가능의 귀책사유는 항상 기다리는 자의 몫이다. 에스트라공은 지쳐서 기다리는 장소를 떠나자고 말하고, 블라디미르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한 사내가 “왜?”라고 묻자 다른 사내는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대답한다. 기다리는 자들은 항상 기다림의 피로감이 신체를 덮치는 순간과 만난다. 피로감은 실패의 현전이다. 우리는 그 피로감 속에서 존재의 비루함과 마주친다. 기다림의 본질이 기다릴 수 없음이라는 걸 깨닫는 것은 기다림이 실패 속에서만 그 본질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기다림을 생각하자니 문득 종말론자의 휴거 소동이 떠오른다. 생업도 정리하고 집도 팔고 오직 기도에 전념하면서 휴거의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통성 기도를 하며 휴거를 기다리던 이들은 얼마나 간절했던가! 정작 휴거의 날이 닥쳤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 휴거가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거품처럼 지나갔을 때 우리는 문득 기다림이 본질에서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휴거를 기다린 자의 어리석음은 잘못된 기다림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세계가 어떤 기다림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게 그 어리석음의 바탕이다. 오늘날 기다림은 존재를 갉아먹는 시간 낭비이거나 존재를 침식하는 지루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기다림이 버리거나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그럴까? 기다림이란 정말 보람 없는 일인가? ‘기다린다는 것’이란 책을 쓴 와시다 가요카즈는 “기다림에는 ‘기대’나 ‘바람’이나 ‘기도’가 내포되어 있다. 아니,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기다림이란 껴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려본 적이 있는 경험이 있다면 잘 알 것이다. 기다림이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며 인내하는 일임을. 기다림의 간절함이, 그것을 품고 껴안으며 견디는 일은 존재의 향기를 만드는 일이다. 내게 작은 향기라도 있다면 그건 내 인생의 숱한 기다림들이 빚은 것이리라. 당신은 내게 잘 지냈느냐고 묻는다. 나는 휴거가 없는 세상의 삭막함을 견디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우리는 기다림 바깥으로 내쳐진 자, 기다림 바깥을 한없이 떠도는 패배자다. 휴거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또 어디선가 기도를 하며 또 다른 휴거의 날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은 긴 머무름이고, 기다림 안에서 지속하는 태도다. 철학자 한병철도 기다림이 하나의 태도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기다림은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기다리는 자는 늘 유예되는 것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기다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태도다. 기다리는 자는 불가능성을 끝없이 반추하는 시간 안에서 하나의 태도를 견디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가능성의 불능 상태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자의 자세다. 기다림이 우리의 현존을, 삶의 양식을 빚는다.

기다림은 늘 더디게 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다. 대상이 늦거나 오지 않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기다림이 무한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설사 그걸 알더라도 기다림을 멈출 수는 없다. 멈출 수 없음. 그게 기다림의 비극이다. 기다림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실패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주체를 삼킨다. 기다림은 신체가 없는 대상의 잉태다. 그 잉태는 고통을 체감할 신체가 없는 까닭에 고통 없이 이루어진다. 고통을 배제한 신체만이 기다릴 자격을 부여받는다. 기다림은 늘 자기 안에 슬픈 존재를 잉태하는 일이다.

기다리는 자는 대상을 환대할 준비를 마친 순간에도 기다림은 실현되지 않는다. 기다림의 주요 성분이 지루함이고, 헐벗은 자가 자기를 위로하려는 소망 안에서의 태도라면 누군가는 기다림을 방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루함이 존재를 삼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다리는 자의 신체는 설렘으로 차오른다. 기다리는 자들이 늘 기꺼이 기다리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기다림이 대상의 발아인 까닭이다. 기다림은 존재의 가난을 초래한다. 기다리는 자는 늘 기다림에 필요한 지루함이라는 비용을 너무 많이 써서 가난해진다. 기다리는 자의 뒷모습이 쓸쓸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기다리는 자는 헐벗은 자다. 기다리는 자는 늘 외로움을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기다리는 자의 내면에 증식하는 것은 우리가 외로움이라고 명명하는 정서, 즉 감미로운 패배의 예감이다. 하지만 기다림은 느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숭고로 차오른다. 기다림은 열매에의 약속이다. 열매는 고유한 향기를 품지만 실익은 없다. 기다림은 향기가 전부인 삶의 태도일 뿐이다. 기다림은 애초에 승리와 승리의 결과로 주어지는 기쁨을 배제한다.

새해를 기다렸던가? 그 새해는 한 달이 지나고, 어느덧 헌 해로 변한다. 기다리는 자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예감과 전조는 희망의 근거다. 우리는 헛된 희망에 자주 속는다. 기다림은 절대 공짜가 아니다. 기다림은 어떤 대가로 요구한다. 즉 우리의 시간을, 피를, 믿음을 요구한다. 우리는 기다림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슬프게도 우리는 기다림 바깥에서 죽는다. 내 생각에 한 인간이 평생 겪는 기다림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기다림을 하나씩 꺼내 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제 내가 가진 기다림은 거의 다 써버렸다. 그렇다면 더는 기다릴 일이 없을까? 산다는 것은 기다림의 지속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사건이다. 나는 기다림의 종말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이 우리가 살아서는 끝내 가 닿을 수 없는 기다림의 궁극이라는 점에서 기다림은 무한이라는 불가능 앞에 우리를 머무르게 한다. 하지만 기다림이 기다리는 행위에 묶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기다림을 포기하지 못한다. 구원은 늘 기다림을 통해서만 올 것이고, 기다림이 미래에 도착할 자를 환대를 예비하는 행위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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