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O 공장의 브리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우가 인수한 후 화장실, 샤워장, 탈의실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했다는 것, 현장이 피부로 느끼는 편의시설을 개선함으로써 새 주인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해 폴란드 내수시장에서 대우 FSO의 티코가 판매량 1위, 라노스가 2위에 랭크됐다. 1위 피아트와 10% 넘게 차이가 나던 시장점유율이 대등해졌다. 잠재돼 있던 근로자들의 역량이 되살아났는데 그 불씨는 대우의 한국식 경영이었다. 그래서 대우의 세계경영은 대우를 세계에 내보내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세계의 다른 수많은 나라에 또 다른 한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FSO에서 브리핑 진행 중 김우중 회장이 필자를 향해 손짓하더니 잠깐 나오라고 했다. 복도 후미진 곳의 의자에 앉더니 “기자들이 내일 뭐하느냐”고 물어봤다. 오전에는 쉬고 오후에는 다른 회사 방문이 예정돼 있다고 했더니 그럼 오전에 폴란드 대통령을 만나면 어떻겠냐고 했다. “예? 대통령을요?” 아무리 대우가 세다고 해도 반나절 만에 남의 나라 대통령의 일정을 뺄 수가 있겠냐고 반문했더니,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FSO보다 대통령 인터뷰로 기사를 만들어 주자고 했다.
반신반의했던 김 회장의 이 제안은 다음 날 출입기자단 대표 5인의 폴란드 대통령 회견으로 성사됐다. 예정됐던 일본대사와의 만남을 미루고 김 회장의 요청에 응했다는 후문도 전해졌다. 김 회장과 폴란드 대통령 간 ‘폴란드라는 나라를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주겠다’는 공감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장담이었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나라 차원의 근대화 계획이었다. 세계를 한국에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세계로 뻗어 나아가는 것이 세계경영의 요체였다.
비슷한 얘기가 아프리카의 수단에서도 있었다. 타이어공장을 만들기로 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자꾸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현지 에이전트는 뒷돈을 찔러주지 않아서 그럴 거라고 했다. 그런데 김 회장이 출장을 가서 대통령을 만나자 바로 승인이 나왔다. 얼마를 줬을까 궁금해하는 주변에 김 회장은 수단 대통령에게 “당신네 나라에 한국을 지어드리겠다”고 했다고 했다.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업이지 대우가 이것으로 큰돈을 벌자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더니 대통령이 크게 만족했다는 것이었다. 세계경영은 짧은 시간에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룬 한국을 발전의 모델로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우든 아니면 누구든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세계경영이었다.
대우가 해체되면서 김 회장의 세계경영도 좌초됐다. 그러나 그는 기업가로서 못다한 꿈이 다음 세대에서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2010년 3월, 대우 창업 43주년 기념식에서 청년기업가 양성과정(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을 제안했다. 그리고 20년간 20만 명의 한국 젊은이들을 해외로 보내 전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펼치게 하자고 했다. 취지에 공감한 필자도 2015년 하노이에서 GYBM 과정의 특강을 했다. 10년 만에 만난 김 회장은 GYBM 과정 졸업생이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다며 기뻐했다. 취업 2년 반 만에 6만5000달러를 모아 몇 년 후 사업할 밑천도 챙겼다고 했다. 전 세계에 한국 기업들이 뻗어가고 있지만, 한국인 사장하고 현지 직원들을 연결할 강한 허리 역할을 GYBM 수료생들이 해낼 거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GYBM은 세계경영의 진화된 모습이자 기업가로서 자신의 조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도 했다. 기업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경제영토를 넓히려 했던 세계경영은 이제 미완의 꿈이 됐다. 그러나 나라를 위한 바른 뜻만큼은 이어져 한국 경제의 미래를 다지는 초석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