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까지는 버텼는데, 3~4월 두달 유가 상승을 이유로 대기업들이 원재료 가격을 연이어 올려 더이상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이달부턴 적자구조다”
A 중소기업은 대기업으로부터 폴리에틸렌(PE)를 공급받아 비닐과 포장재를 생산한 뒤 다시 이를 대기업 및 지역 조합 등에 납품하고 있다. PE는 비닐과 포장재의 원료로 원유에서 뽑아내는 나프타가 그 원료다. 원유 가격이 급등하면 가격이 줄줄이 오를 수밖에 없다.
A기업과 거래 중인 대기업들은 올들어 4개월 간 PE 공급가를 월평균 15만 원, 모두 60만 원(톤당) 올렸다. 원재료 급등의 1차적인 원인은 유가였지만 여기에 지난달 여천ncc(여수 화학공장) 폭발사고 여파로 인한 생산 지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수급 문제, 해상 물류비 인상 등의 악재가 겹쳐 가격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게 대기업들의 설명이었다. 평균 50억 원 안팎의 매출을 내는 A기업 대표는 이달부터 회사가 적자 구조로 돌아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생산비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원료 가격이 치솟았지만 중간재를 납품하는 조합이나 대기업들과의 단가 계약이 마무리돼 이를 적용할 길이 없다. 전형적인 ‘샌드위치 납품단가’ 사례다.
A사 대표는 “상상도 못할 수준까지 원료 가격이 올랐다”면서도 “우리보다 영세한 기업의 상황은 말도 못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확산 이전 저렴한 가격에 공격적으로 들어오던 미국산 원재료가 코로나19 이후 현재 간헐적으로 수입되고 있다”며 “이 와중에 대기업들이 대규모 기계 정비를 내세워 보름 넘게 생산을 멈추는 등 사실상 물량 공급을 조절하는 것 같아 어려움이 더 크다”고 하소연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이 지난 2005년 작성한 ‘유가 및 원자재 가격 상승이 중소기업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원유도입단가가 1% 오르면 6개월 후 대기업 생산은 약 0.12% 감소한다. 반면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두 배 수준인 0.23% 줄었다. 연구원은 “고유가의 충격이 기업 생산에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유가가 업계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체급과 체질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은 외부 충격에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레미콘 업체인 B사 측도 “시멘트, 골재, 운반비가 줄줄이 올라 부담이 큰데, 물류비와 관련해 운송기사들의 파업까지 더해졌다”며 “유가 상승으로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더 큰 문제는 레미콘업계와 건설업계 간 납품단가반영에 대한 온도차가 여전히 크다는 점이다. 단조업체인 C사도 원가 상승을 반영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 컸다. 이 회사 대표는 “원료 가격이 올라도 대기업이 반영을 잘 해준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상생하지 않는게 문제”고 잘라 말했다.
원자잿값와 물가, 유가, 운임 등은 모두 산업계 원가 이슈에 속한다. 특히 유가 급등은 시차를 두고 원재료, 운송비, 생산자·소비자 물가에 상승압박을 가할 수 있어 산업계 전반에서 피해가 가시화될 수 있다. 핵심은 대기업의 경우 원가 부담을 소화하지 못하면 아래로 이를 전가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그 충격파를 온전히 흡수해야 한다. 노민선 중기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제조기업의 40%~45%가 하도급기업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중소기업이 원가 이슈 어려움에 처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유가가 물가를 밀어올려 정부가 시장의 돈을 풀지 않으면 돈줄이 막힌 중소기업은 자금난에 휩싸일 수 있다. 국제유가 등 원자재가격 상승 영향에 올해 2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14.82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중기업계 한 관계자는 “물가가 급등하면 체질이 약한 중소기업의 도산 위험을 키울 수 있어 중소기업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노 박사는 “가장 시급한 건 납품단가 연동제지만 중소기업이 원가 이슈에 대응할 수 있게 생산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라며 “새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으로 생산성 향상 특별기구 등을 만들어 중소기업이 처한 문제를 차기정부 국정 아젠다로 제시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