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서울에서 제주로 가는 항공권을 1만 원대에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대가 아침이거나 일찍 예약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발품만 팔면 왕복 항공권을 5만 원 내로도 얻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1만 원대 항공권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항공권 가격에 포함되는 ‘유류할증료’가 8년 만에 1만 원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저렴한 항공권을 찾아도 유류할증료와 공항시설사용료 등을 포함하면 최종 구매 가격은 1만 원을 훌쩍 넘어섭니다.
유류할증료는 유가가 일정 금액을 웃돌아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을 때 항공사가 발권 시점을 기준으로 운임에 추가로 부과하는 요금입니다. 유가가 낮을 땐 부과되지 않습니다. 국내선 유류할증료는 한 달 전 매월 첫째 주, 국제선 유류할증료는 매월 중순께 공지됩니다. 5월 국내선 유류할증료가 4월 초에 발표되는 식입니다.
국내 항공사의 유류할증료는 싱가포르 현물시장 항공유(MOPS) 평균가격에 따라 변동됩니다. 항공유 가격이 1갤런당 120센트를 넘으면 단계별로 일정액을 유류할증료에 적용합니다. 지난해 배럴당 60달러 남짓이던 싱가포르 항공유 가격은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2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국내선 유류할증료는 2014년 9월을 마지막으로 줄곧 1만 원대 아래를 유지해왔습니다. 2020년 5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는 부과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항공업계가 공시한 국내선 유류할증료는 올해 2월 5500원을 시작으로 △3월 8800원 △4월 9900원 △5월 1만4300원 등으로 빠르게 올랐습니다. 5월 유류할증료는 한 달 만에 44%나 인상됐습니다.
국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4월 국제선 유류할증료는 3월보다 4계단 상승한 14단계가 적용됐습니다. 편도 거리에 따라 2만8600~21만600원이 부과됩니다. 3월에 10단계가 적용돼 1만8000~13만800원이 부과된 것과 비교하면 최대 53.3%가 오른 겁니다. 곧 공시될 5월 국제선 유류할증료는 이보다 더 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항공사가 유류비를 과도하게 소비자에 떠넘기는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류할증료를 올려도 항공사는 수익성을 충분히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항공 산업 자체가 유류비에 막대한 비용을 쏟는 구조라서 그렇습니다. 1년에 항공사가 지출하는 비용의 무려 30% 이상이 기름값으로 사용됩니다. 요즘처럼 유가가 폭등하면 항공사가 울상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럼 항공기는 기름을 얼마나 많이 사용할까요? 장거리용 항공기 보잉 747-400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B747-400은 최대이륙중량이 397톤에 달하는 대형기입니다. B747-400에는 연료를 최대 21만6840ℓ까지 채울 수 있습니다. 이는 쏘나타 같은 2000㏄ 중형 승용차 3000대 이상을 채울 수 있는 양입니다.
B747-400은 최대이륙중량 상태에서 최대 1만3450㎞를 날아갈 수 있습니다. 연비로 환산하면 0.062㎞/ℓ, 즉 리터 당 62m를 비행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중형 승용차가 리터당 연비가 10㎞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비교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기름을 사용하는 겁니다.
최근 여행 수요가 급증하자 항공업계도 속속 국제선 재운항을 준비하고 나섰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은 이달부터 인천발 나고야 노선 운항을 재개했고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노선을 증편했습니다. 3일부터는 25개월 만에 인천~하와이 노선 운항도 재개했고요. 6월부터는 인천~파리, 로마 노선을 다시 운항하고, 프랑크푸르트와 런던 노선은 운항 횟수를 늘립니다.
제주항공은 5월부터 국제선 노선을 기존 8개에서 14개로, 운항횟수는 88회에서 174회로 늘립니다. 동남아와 대양주 지역에 집중적으로 운항을 확대하고, 휴양지인 베트남 다낭과 나트랑을 비롯해 필리핀 보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는 새로 운항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티웨이항공은 5월부터 인천~인천~후쿠오카, 오사카, 도쿄, 다낭, 방콕, 호찌민 노선 운항을 재개합니다. 인천~괌 노선도 이달 23일부터 운항을 재개하고 현재 주 2회 운항 중인 인천~사이판 노선은 5월부터 주 4회로 증편할 계획입니다.
진에어는 16일부터 부산~괌 노선 운항을 재개하며 에어부산은 이달 30일부터 부산~괌 노선을 주 2회 일정으로 재운항합니다. 에어서울은 5월 14일부터 인천~괌 노선에 항공기를 다시 띄우고, 5월과 6월에는 각각 베트남 다낭과 나트랑 노선 운항을 재개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유례없는 침체를 겪은 항공업계는 운항 재개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자칫 국제유가가 반등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원자재 가격이 정점을 찍고 점차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발간한 ‘주요 원자재 공급망 구조 분석 및 가격 상승의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4분기에 원유는 배럴당 80달러대로 하락할 전망입니다. 보고서는 “최근 원자재 가격 급등의 원인이 공급 부족보다는 전쟁 불안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한 결과”라며 “원자재 가격은 하반기에 들어가면 불안 심리 완화와 재고증대에 힘입어 내림세가 뚜렷해질 것”이라 내다봤습니다.
전망은 긍정적이지만, 최근의 유가 급등은 반등을 준비 중인 항공업계에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모처럼 해외여행을 떠나보려는 소비자에게도 부담이 되긴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는 국제선 항공편을 빠르게 늘려 10월에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50% 수준을 회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업계의 전망대로라면 국제선 공급이 확대되는 시점에 국제 유가도 점차 안정세를 찾을 예정입니다. 소비자도 걱정 없이 미뤄왔던 여행을 떠나고, 항공업계도 다시 쉴 새 없이 바빠질 그 날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