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크래커] 필리핀은 암울한 역사를 잊었나...대통령 엄마로 돌아온 ‘사치의 여왕’ 이멜다

입력 2022-05-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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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간) 이멜다 마르코스가 필리핀 일로코스 노르테주 바탁의 대통령 선거 투표소를 찾았다. (연합뉴스/AFP)
▲9일(현지시간) 이멜다 마르코스가 필리핀 일로코스 노르테주 바탁의 대통령 선거 투표소를 찾았다. (연합뉴스/AFP)
9일(현지시간) 필리핀 일로코스 노르테주 바탁의 한 대통령 선거 투표소에 화려한 복장의 할머니 한 명이 입장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벌집 모양의 헤어스타일에 샤넬 브로치가 달린 빨간 점프슈트, 진주 팔찌를 착용한 사치스러운 모습이었죠.

경호원 5명까지 대동하고 등장한 이 여성은 바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였습니다. 이멜다가 이번엔 대통령의 어머니로 돌아왔습니다.

구두만 3000켤레...‘부패의 상징’ 이멜다

▲마르코스 일가가 망명한 후 1986년 3월 11일 필리핀 말라카냥 궁에서 찍힌 이멜다의 신발 컬렉션. 이멜다 마르코스의 옷방에는 최일류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최고급 의상과 구두, 가방,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연합뉴스/AP)
▲마르코스 일가가 망명한 후 1986년 3월 11일 필리핀 말라카냥 궁에서 찍힌 이멜다의 신발 컬렉션. 이멜다 마르코스의 옷방에는 최일류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최고급 의상과 구두, 가방,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연합뉴스/AP)
9일 치러진 필리핀 대선에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이 당선됐습니다. 마르코스 집안이 26년 만에 다시 권좌에 오르게 된 건데요. 그런데 전 세계는 새 대통령보다 그의 어머니 이멜다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멜다는 1965년부터 21년간 장기 집권한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입니다. 마르코스는 정권을 잡은 뒤 7년이 지난 1972년부터 1981년까지 계엄령을 선포해 수천 명의 반체제 인사를 고문하고 살해하면서 독재자로서 악명을 떨쳤습니다. 이멜다는 남편의 집권 기간 초대 마닐라 주지사와 주택환경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죠.

1986년 ‘피플파워’ 혁명이 일었고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쫓겨나다시피 하와이로 망명했는데요. 망명 후 이멜다의 극심한 사치 행각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당시 말라카냥궁(대통령궁)에서는 이멜다가 미처 챙기지 못한 15벌의 밍크코트, 508벌의 명품 드레스와 888개의 가방, 구두 3000켤레가 발견된 겁니다. 2003년 그의 전기를 담은 영화 ‘이멜다’에는 8년 동안 단 하루도 같은 구두를 신은 적이 없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심지어 이멜다가 지냈던 궁의 바닥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천장은 수정 샹들리에로 장식돼 있었습니다. 이멜다의 침실에는 황금으로 도금된 자신의 모습을 본뜬 동상이, 욕실에서는 100% 황금으로 만들어진 세면대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마르코스 일가가 부정하게 축재해 빼돌린 돈은 100억 달러(약 12조 7000억 원)에 이릅니다.

‘독재자의 아들’ 대통령 당선...이멜다에 쏠리는 시선

▲다큐멘터리 ‘킹메이커’ 속 이멜다 마르코스. (뉴시스/AP)
▲다큐멘터리 ‘킹메이커’ 속 이멜다 마르코스. (뉴시스/AP)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망명 3년 후 하와이에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멜다의 야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멜다는 1991년 필리핀 대법원의 사면을 받고 귀국합니다. 1995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2018년 7개 반부패 혐의로 7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불과 약 320만 원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죠. 이멜다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하원의원직을 계속 맡고 있습니다.

이멜다는 후선에서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를 통한 가문의 복권을 시도했습니다.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죠. 이멜다는 아들을 위해 역사까지 왜곡하고 나섰습니다. 마르코스 일가가 시민들에 쫓겨 망명길에 오른 것이 아니라 납치됐었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9년간 이어진 계엄령을 두고는 “정의와 인권, 자유가 가장 넘친 시기”라고 평가했죠.

마르코스는 어머니의 조언을 받으며 주지사부터 상원의원까지 재집권을 향한 정치 권력을 쌓아왔죠. 마르코스는 아버지 마르코스의 집권기를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사회가 안정된 황금기로 미화하는 데 앞섰습니다. 2016년 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한 그는 이멜다의 강력한 권유로 이번 대선에 출마해 승리했습니다.

이에 필리핀이 독재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9일(현지시간)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회수된 재산을 되찾고 가문에 걸려있던 부패혐의 무마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멜다가 수렴청정 방식으로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죠.

이멜다의 복귀...필리핀 정치의 민낯

▲7일 필리핀 마닐라의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서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REUTERS)
▲7일 필리핀 마닐라의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서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REUTERS)
부패의 상징으로 통하는 이멜다가 대통령의 어머니가 돼서 돌아온 건 현 젊은 세대가 36년 전 독재 체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마르코스 주니어의 지지자 중 다수는 30세 미만의 젊은 층입니다. 이들은 아버지 마르코스의 폭압 정치나 인권침해를 경험해보지 않았죠. 게다가 마르코스 주니어가 페이스북 팔로워만 530만 명이 넘는 소셜 인플루언서라는 점도 유효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는 SNS를 동원해 독재에 대한 허위 정보를 만들어 젊은 세대를 공략했죠.

워싱턴포스트는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선되는 데 젊은 유권자들도 도움이 됐지만, 이러한 결과는 경제와 정치 권력이 여전히 소수에게 집중된 필리핀 정치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분석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런 상황을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독재자로부터 피 흘려 얻어낸 민주주의를 잊고, 다시 독재자 가문에 표를 던지는 필리핀의 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56년 전 영부인이 된 이멜다는 이제 대통령의 어머니가 되어 말라카냥궁에 복귀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부정 축재한 돈으로 사치를 부리고 있고, 국민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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