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도심 속을 가득 채우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유권자 여러분을 제 몸처럼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발자국마다 밟히던 사랑 타령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매미 소리보다도 더 줄어 들리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하다던 사랑, 너무나 익숙해진 사랑, 그 사랑들 속에 서서 나는 사랑을 바라봅니다. 내가 경험한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어린 시절 직장이 멀었던 아버지의 퇴근은 늘 늦으셨습니다. 보온밥솥이 없던 때 항상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던 건 한 장의 담요를 덮은 아버지의 밥공기였습니다. 대학 시절 하숙을 하던 때였습니다. 밤마다 나를 찾아와 글을 가르쳐 달라시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밭일에 지친 몸으로 달빛 아래 배운 글자를 한 올 한 올 엮어 딱딱 소리 나는 굽은 손으로 완성한 편지 한 장, 그 봉투 겉면에 크게 쓰인 수취인은 군대에 간 손자였습니다. 그리고 전공의 시절 어스름한 새벽녘, 무릎 꿇고 기도하던 여자 한 분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아이를 위해 먼 길을 기꺼이 달려와서 스스로 환자가 되셨던 분, 병동에서 하얗고 예쁜 손으로 작성하던 종이는 장기이식서약서 한 장이었습니다.
사랑이 넘치고, 목숨보다 위대한 사랑과 모든 것을 바친다는 큰 사랑이 목청을 높이는 이때, 난 한 장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의 밥공기를 덮었던 어머니의 담요 한 장, 굽은 손으로 써 내려간 할머니의 편지 한 장,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며 떨리는 손으로 쓴 장기이식서약서 한 장. 차갑게 식은 세상을 떠받치며, 힘든 이들에게 삶을 이어가게 해 주는 건 목청 큰 사랑 타령도, 흔해 빠진 하트 모양도 아닌 바로 소리 없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그런 사랑이 아닐는지요.
진료실 문이 열리고 밤새 신음했던 환자의 기록 한 장이 컴퓨터 화면에 띄워집니다. 나는 오늘 이 한 장에 어떤 사랑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입이나 손으로만 하는 흉내가 아니어야 할 텐데….
오래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소중한 한 장 한 장의 사랑을 다시 떠올려봅니다.박관석 보령 신제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