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조 원. 외국인 투자자들이 9월 들어 나흘간 한국증시(코스피, 코스닥, 선물)에서 팔아치운 자산이다. 원·달러 환율은 1380원을 돌파했고, 물가는 좀처럼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석 달 연속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을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면서 글로벌 핫머니의 이탈이 본격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미 금리가 역전되면서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금리가 더 낮은 한국에서 돈을 굴릴 유인이 사라진다.
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는 이달 들어(1~7일) 코스피 시장에서 1조1068억 원어치 순매도했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2033억 원 팔아치웠고, 선물시장에서는 1조9584억 원이 빠져나갔다. 총 3조2685억 원에 달하는 외국인 투자금이 4거래일 만에 증발했다.
증시 주변 여건도 외국인 투자금의 이탈을 부추긴다.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투자 부진 속에 불쑥 튀어나온 고물가·고환율·고금리 등 대내외 악재는 한국 경제를 스태그플레이션(경기불황 속 물가 상승)의 늪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384.2원에 마감했다. 1380원을 돌파한 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13년 5개월 만이다. 올해 들어 달러화는 15%가량 강세를 보인 가운데, 원화 가치는 달러화 대비 13% 정도 약세를 나타냈다. 특히, 달러화 강세는 미국 채권금리 상승에 동조화하고 있다. 파월 연준의장의 금리인상 지속 발언으로 예상보다 미국 채권금리 상승과 달러 강세가 길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 세계 경기침체 논란, 한국경제 수출타격 우려, 미국 연준의 양적긴축 등으로 경제여건 측면에서도 원·달러 환율의 상승 요인이 우세하다. 일각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설 가능성도 나온다. 원·달러 환율 급등 구간에서도 비교적 양호했던 외국인 수급 환경은 보수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오창섭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미국 달러화 강세 및 글로벌 경기침체 논란 등으로 향후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수준까지 상승할 가능성에 유의해야 한다”며 “과거와 달리 원·달러 환율 상승이 수출개선 효과는 미미한 가운데 원자재 수입 증가 등으로 무역적자가 크게 확대되는 등 한국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자산 거품은 이미 꺼지기 시작했다. 이날 코스피 지수는 2376.46으로 7월 22일(종가 2393.14) 이후 한 달 반 만에 2400선이 붕괴했다. 연초 3000선에 근접해 시작했던 코스피지수는 1월과 6월 큰 하락폭을 겪으면서 7월 2200대까지 내려왔다. 서머랠리를 거치며 2500선까지 소폭 반등했지만, 다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 증시는 글로벌 달러화 초강세, 미국 금리 상승 등에서 기인한 선진국 증시 약세에 영향을 받으면서 제한적인 주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주식뿐만 아니라 부동산 가격과 가상화폐 등 대표적인 투자 자산들의 가격도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최근 트위터에 “부동산, 주식, 금, 은, 비트코인 등 모든 자산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6월에도 미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면 ‘역사상 가장 큰 자산 폭락이 온다’고 전망했었다.
자산은 꺼지는데, 물가도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유로존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9%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또 경신했다. 미국 CPI 상승률은 지난 3월부터 석 달 연속 8%대에 머물렀고, 지난 6월에는 41년 만에 최고 수준인 9.1%를 기록했다. 오는 13일(현지시간) 발표될 예정인 미국 CPI에서 만족할 만한 숫자를 확인하지 못하면, 연준은 또다시 자이언트스텝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서정훈 삼성증권 연구원은 “잭슨홀 이벤트 이후 금융시장 전반의 긴축 경계감은 한층 높아진 상태”라며 “이번 주 파월 의장을 비롯한 주요 연준위원들의 연설이 내일부터 이어지고, 다음 주 13일, 8월 소비자물가지수가 발표 예정인 만큼 해당 기류는 당분간 더 이어질 공산이 크다”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