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法 “불법구금만 따로 소멸시효 완성 안 돼…과거사정리법 적용”
2021년 장모 씨 국가배상판결 재확인…‘중대한 인권침해‧조작사건’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와 보안사령부(보안사)에 의해 조작된 1987년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누명을 쓴 양모 씨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이 확정됐다. 대법원은 같은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 받은 장모 씨에 대해 국가배상을 판결한 2021년 5월 대법 판례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특히 대법원은 이번 양 씨 사례를 통해 안기부‧보안사 등 수사기관의 수사 발표, 보도자료 배포, 지명수배 조치, 구금까지 수사기관의 일련의 행위가 ‘전부 불법’이라고 확인했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양 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 사건에서, 원고 양 씨에 대한 지명수배가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나아가 불법 구금만 따로 중대한 인권 침해‧조작 의혹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 과거사정리법 적용을 부정하고 그 부분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고 9일 밝혔다.
대법원은 “피고(대한민국) 산하 안기부 및 보안사가 불법구금‧가혹행위 등으로 위법하게 증거를 수집했고 이에 기초해 이뤄진 수사 발표, 보도자료 배포, 지명수배는 모두 원고 양 씨에 관한 수사 절차의 일환으로서 전체적으로 위법하다”고 평가했다.
법원에 따르면 안기부 등은 1987년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장 씨를 겨냥한 위법한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양 씨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대남공작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장 씨에게 지령을 내린 간첩’이라는 취지로 수사 발표 및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수사기관은 1993년 양 씨를 지명 수배하고, 이로 인해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던 양 씨가 입국하자 1998년 불법 구금해 수사했다. 2018년 양 씨와 그 친족들은 대한민국에 국가배상을 청구하게 됐다.
원심은 양 씨에 대한 수사 발표 및 보도자료 배포, 불법 구금이 위법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지명 수배는 소재불명 된 피의자의 소재 발견을 위한 수사 방편의 하나로서 수사기관 내부의 단순한 공조 내지 의사연락에 불과하므로 지명수배 조치 자체가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원심 재판부는 불법 구금에 대해서는 양 씨가 자수 형식으로 귀국‧조사받으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자백 취지로 진술했다는 등의 이유로 중대한 인권 침해‧조작 의혹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불법 구금에 있어선 피고 대한민국 정부의 국가배상청구권이 시효가 완성돼 소멸했다’는 항변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라며 원심 판결 일부를 깨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우선 대법원은 지명수배 조치가 위법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피고 산하 안기부가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구금‧가혹행위 등 위법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했고 이에 기초해 이뤄진 수사 발표, 보도자료 배포, 지명수배는 모두 원고 양 씨에 대한 수사 절차의 일환으로서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하여 그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대법원은 불법구금에 대해서만 개별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고 산하 안기부 및 보안사 수사관들이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 구금, 가혹 행위 등을 통해 받아낸 ‘임의성 없는 자백’을 기초로 ‘증거를 조작’한 사건으로 과거사정리법상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조작 의혹 사건’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따라서 원고 양 씨에 대한 ‘수사 발표→보도자료 배포→지명수배→불법 구금’은 모두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조작 의혹 사건을 구성하는 일부분이고, 이 중 일부 행위만을 떼어내서 과거사정리법의 적용을 부정하는 것은 상당하지 않다고 대법원은 설명했다.
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