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그룹 창업주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임종윤·종훈 형제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OCI그룹과의 통합은 백지화됐지만, 가족 간 극단으로 치달았던 갈등을 봉합하고 회사 성장 전략을 구체화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2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전날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정기주주총회에서 임종윤·종훈 형제가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이 밖에 형제 측이 주주제안한 권규찬·배보경 기타비상무이사와 사봉관 사외이사가 모두 선임됐다. 한미사이언스 측이 낸 6명의 선임안은 모두 부결되면서 형제의 완승으로 끝났다.
현재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는 사내이사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과 사외이사 신유철·김용덕·곽태선 4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임종윤·종훈 형제 측 5명이 신규 진입하면서 단숨에 과반을 차지했다.
앞서 송영숙 회장은 25일 임종윤·종훈 형제를 한미사이언스·한미약품 사장에서 해임하고, 26일 고(故) 임성기 선대회장의 후계자로 장녀 임주현을 지목했다. 주총을 하루 앞둔 27일에는 임주현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면서 두 아들에게 명백히 등을 돌렸다. 임주현 부회장 역시 오빠인 임종윤 한미약품 사장에게 266억 원 규모의 대여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주총 승리 직후 임종윤·종훈 형제는 가족 간의 화합을 강조했다. 임종윤 전 사장은 “(어머니·여동생과)같이 가길 원한다”라고 말했으며,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는 “가족들의 힘을 합치겠다”라고 화해의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송영숙·임주현 모녀 측은 OCI와 통합이 무산된 점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송영숙 회장은 29일 그룹사 온라인 게시판에 “다수의 새 이사진이 합류할 예정이어서 임직원 여러분이 다소 혼란스러워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하지만 회장으로서 말씀 드린다. 한미에 바뀐 것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조금 느리게 돌아갈 뿐이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그대로 갈 것”이라며 “통합안을 만들게 했던 여러 어려운 상황들은 그대로이므로, 경영진과 새롭게 구성된 이사회가 힘을 합해 신약명가 한미를 지키고 발전시킬 방안을 다시금 찾아보겠다”라고 말했다.
한미사이언스도 이날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체적으로 신약개발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양사가 마음을 터놓고 뜨겁게 협력했다”며 “이 시간을 함께해준 OCI 측에 감사하다”란 입장을 내놨다.
송영숙·임주현 모녀의 한미-OCI 통합안은 거액의 상속세에서 출발했다. 한미그룹 창업주 일가는 임성기 선대회장이 사망한 2020년 5400억 원의 상속세를 부과받았다.
임주현 부회장은 최근 입장문에서 “저와 어머니는 현실적인 상속세 문제를 타개하면서도 한미그룹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식으로 OCI와의 통합을 선택했다”라며 상속세 납부에 대한 부담을 드러냈다.
창업주 일가는 4년에 걸쳐 상속세를 냈지만, 여전히 약 2000억 원 규모의 잔여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영숙·임주현 모녀 측은 주총 직전까지 임종윤·종훈 형제에게 잔여 상속세를 납부할 재원을 공개하라고 맹공을 퍼붓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임종윤 전 사장은 “상속세를 납부할 재원이 없어 내 지분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회사를 경영하지 말아야 한다”라면서 “저희는 상속세 재원 마련에 문제가 없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두 형제가 각자의 상속세를 낼 방안이 있다 하더라도, 상속세 연대납부 책임에 따라 모녀의 상속세까지 해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두 형제와 모녀의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이 점쳐진다.
한미그룹의 핵심 사업회사 한미약품은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1조4910억 원, 영업이익 2207억 원의 호실적을 기록했다.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한 방’이 필요하단 평가가 나온다.
경영권 분쟁 기간 임종윤 전 사장은 한미약품을 5년 안에 순이익 1조 회사로 만들고 시가총액을 200조 원 규모로 불리겠단 성장 계획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한미약품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위탁개발(CDO)·임상시험수탁(CRO)까지 확장하고, 마이크로 GMP를 100개의 바이오의약품을 생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경제성이 높은 바이오의약품 위주로 사업을 전환해야 하는데 한미는 현재 뒤처져 있다”라고 지적하며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이 아닌 정통 CDO·CRO로 차별화해 1조 원 이익을 달성하겠다”라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바이오의약품 100개 생산 전략은 2021년 전문가들과 함께 계획·설계하고 검증을 마친 사항으로서 자세한 기술과 전략은 현재와 같이 예민한 시점에서는 공개하기 어렵다”라고 말을 아껴 경영권 분쟁이 일단락되면서 세부 내용을 선보일 차례가 됐다.
또한, 임종윤·종훈 형제는 경영권을 되찾으면 1조 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겠다고 약속해 이에 대한 설명도 남아 있다.
임 전 사장은 미래 성장 전략과 관련해 주총이 끝나고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 “정식으로 공유하겠다”라면서 자신의 머릿속 구상을 세부적으로 발표할 것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