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월 2일 한국거래소를 방문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자본시장 규제는 과감하게 혁파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역대 최초 대통령 증시 개장식 참여’라는 기록과 함께 국가 수장이 밸류업 프로그램 시작을 선포한 날이었다.
윤 대통령이 막을 올린 밸류업 프로그램은 정작 그 불을 댕긴 주체가 가까스로 붙은 불씨를 꺼버린 처지에 놓였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직후인 12월 4일 아침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브랜드 가치는 박살 났다.” 6시간여만에 급작스러운 폭풍이 몰아친 한국을 본 국내외 투자자들의 국내 증시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을 것이며, 이번 일로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였다.
밸류업 프로그램 성공에 필수로 꼽힌 외국인 유도는 계엄 사태 이전에도 원체 쉽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는 그들에게 한국은 ‘지뢰밭’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 긴장과 후진적 기업 거버넌스는 외국인들이 증시를 거친 한국기업 투자를 망설이게 만드는 대표적 장애물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한국 증시의 낮은 밸류에이션은 여전히 매력적 요소였다. 이따금 벌어지는 북한의 군사 도발에도 국내 증시는 며칠 만에 안정을 찾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정책을 뜯어고쳐 국내 기업가치를 높이겠다고 나서자 시장은 환영했다. 본래 시장은 국가 개입을 싫어하지만, 밸류업 프로그램은 예외였다.
밸류업에 의욕적인 정부와 기대감, 의구심을 동시에 품은 시장 사이의 미묘한 긴장은 탄핵 정국을 거치며 ‘그럼 그렇지’라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급변하는 정국은 밸류업 프로그램 공개(2월 26일),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 발표(5월 2일), 밸류업지수 가동(9월 30일)을 거치며 착착 진행되던 밸류업 작업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간 국내 증시가 선진국이 아닌 신흥국 밸류에이션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도 여실히 보여줬다.
한국은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단임제는 여러 장단점이 있지만, 정책 지속성 측면에서는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받아왔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야 협치가 원활히 이뤄지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전 정권 지우기’ 차원에서 대규모 국가사업이 손바닥 뒤집듯 엎어지기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밸류업 프로그램도 이런 환경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언할 수 없다.
한국 정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헌법재판소 탄핵 인용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기 대선이 거론된다. 어딜 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시장의 요구는 명백하다. 믿을 만한 시장을 만들어 투자자도, 기업도, 국가도 한층 부유해질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어도, 밸류업 프로그램은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