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이 현행 의료법상 업무개시명령의 발동 기준과 적용 대상을 명확히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의료정책연구원은 23일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의료정책포럼을 열고 정부가 업무개시명령을 남발해 의사들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재발 방지를 위한 법률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날 포럼에는 의협, 한국의료법학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의료계와 법조계 전문가들이 참석해 의견을 나눴다.
의료인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의 근거는 현행 의료법 제59조 제2항이다. 해당 조항은 보건복지부 장관,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의료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중단하거나 의료기관 개설자가 집단으로 휴업하거나 폐업해 환자 진료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거나, 초래할 우려가 있으면 업무개시 명령을 할 수 있다.
해당 조항에 근거해 정부는 지난해 2월 전공의들이 대거 사직하자 병원 측에는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을, 전공의들에게는 진료유지명령과 업무개시명령 등을 내렸다. 정부는 불응한 이들에 대한 행정처분도 예고했지만, 같은 해 6월 한 발자국 양보해 각종 명령을 철회했다. 이에 전공의들의 사직서가 수리되면서 병원의 인력 공백이 장기화 국면을 맞았다.
관련 뉴스
김택우 의협 회장은 “정부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있을 때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업무개시 명령을 남발했다”라며 “시대정신과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는 부분인지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의료법의 업무개시명령은 국가적 위기상황에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데, 발동 기준 불명확하고 의료인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크다”라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퇴사한 전공의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의 적용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다. 전공의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며, 퇴사로 근로계약 관계가 종료되면 진료할 의무도 없기 때문이다. 기준이 모호하다는 문제점도 크다. 법률에 명시된 ‘정당한 사유’나 ‘상당한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어, 행정청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위험이 있다.
김용범 법무법인 오킴스 대표 변호사는 “의사가 자신의 의지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과의 근로관계를 적법하게 종료한 경우를 ‘정당한 사유 없는 진료 중단’으로 볼 수 없다”라며 “퇴사한 전공의에게까지 업무개시명령을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강제노동으로 헌법상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업무개시명령 제도의 절차적 보완과 실체적 요건의 명확화가 시급하다”라며 “엄격한 절차적 통제 장치를 도입하고, 퇴사한 의료인에 대한 업무개시명령 적용 범위를 명확히 제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의료인의 적정 근무환경 보장, 충분한 보상체계 구축 등을 통해 의료서비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업무개시명령이라는 강제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이라고 제언했다.
김소윤 한국의료법학회 회장은 “의료인 업무개시명령을 폐지 또는 보완하는 과정에서 건강권에 대한 국민의 걱정을 어떻게 불식시킬 수 있을지, 앞으로 미래 세대의 의사들이 국민에게 불안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유영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은 “국가의 강제에 무조건 따르도록 하는 제도는 결국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전공의들은 국가가 일하라고 하면 ‘네’ 해야만 하는 인프라 취급받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회사를 그만둔 사람에게 다시 출근해서 일하라고 하는 국가가 어디에 있나”라며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구조 속에서는 소신 있게 일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