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官)이 변하지 않으니 민(民)이 나섰다.
재계의 올해 화두는 향후 10년, 나아가 100년을 내다 본 변화(變化)와 혁신(革新)이다.
사람, 조직, 사업구조 등 모든 부분에서 이른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시대, 변화는 생존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요건이 됐다.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이야말로 수명 연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혁명적 변화에 대한 재계의 각오는 주요 그룹 총수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해 말 ‘변화’를 설파했다. 이 회장은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10년 내 대부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채우려면 기존 틀을 깨는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변화의 수단으로 ‘젊음’을 택했다.
지난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했던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가장 강도높은 발언이다. 세계 1위 제품군을 다수 보유한 삼성이지만 100년을 내다보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총성없고 국경없는 치열한 전쟁터인 글로벌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현실에 안주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뼈 아픈 자성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경영복귀 이후 첫 일성이라는 점에서 삼성그룹 전체가 잔뜩 긴장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도 “시장 선도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며 강도높은 혁신을 주문했다.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LG전자가 스마트폰 혁명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았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여기에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LG전자의 자존심, 그보다는 생존을 위해 “독하게 변해야 한다”며 임직원들을 다그쳤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새로 시작되는 10년 동안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그림의 프레임을 바꿔 무엇을 담아야 할 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수기업의 한계를 절감한 SK그룹으로서는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서는 게 100년 지속기업으로서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의미심장한 고민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품질)으로 돌아가자’는 전략을 택했다. 본업인 자동차 부문을 튼실히 하는 한편 현대건설 인수로 계열사간 시너지를 확대할 경우 시대적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재계의 이같은 혁명적 변화는 사람, 문화, 사업구조 등 분야를 막론한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젊은 삼성’발언으로 시작된 재계의 젊음 열풍은 젊은 인재의 발탁과 승진으로 이어졌다. 생물학적 젊음 뿐 아니라 정신적 젊음도 추구하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활용한 기업의 소통 움직임도 혁신의 중심 축이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응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혁신과 성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지만, 이를 실행해 내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이같은 변화를 장기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업문화이기 때문이다.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제조업 중심에서 신재생에너지, 바이오 등 환경친화적인 신수종 사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가 하면 고객의 마음을 끄는 ‘서비스’와 ‘문화’를 중요한 경영가치로 떠올랐다.
이같은 국내 그룹의 혁신 움직임에 대한 당위성은 글로벌 기업의 사례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미국 기업 듀폰(DuPont)은 지난 1802년 화약제조업체로 출발했지만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개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종합 과학회사’가 됐다. 매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섬유사업을 과감히 포기하며 지난 2004년에 팔아 치웠다. 대신 지구의 기후변화에 주목, 종자(種子)회사인 파이오니어를 사들이며 식량산업 개발에 나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미국의 IBM은 오는 6월 16일로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샘 팔미사노 IBM 회장은 지난달 1일(현지시각) “지난 100년 동안 세상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장기적인 안목에 기초한 전략과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독려하는 기업문화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한국지속경영학회장)는 “진정한 장수기업은 ‘오래된 기업’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불로(不老)기업’을 의미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