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은 지난 8월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발표한 메시지에서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점점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면서 “지도자들은 돈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데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곳곳의 혼란과 갈등, 분노의 진원지가 결국 ‘경제 문제’,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원로 성직자의 지적은 시기적절하다. 특히 부의 양극화. 부의 불균등한 분배 문제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도처에서 현대 사회의 가장 주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부의 양극화 문제는 그 자체로 그치지 않고 계층의 고착화라는 또 다른 사회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판 계급…“강남 살아야 폼난다”= “대한민국 수도는 둘이다. 강남권의 서울이 있고, 비강남권의 서울이 있다. 이에 따라 1등 서울시민과 2등 서울시민으로 나뉜다.”
올초 한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에선 ‘2011년 수도권 계급표’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현대판 계급표’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수도권 땅값을 기준으로 황족에서부터 왕족, 중앙귀족, 호족, 중인, 평민, 노비, 가축으로 표기한 게시물은 ‘내 사는 곳은 어떤 계급에 속할까’라는 어줍잖은 궁금증을 유발해 내기에 충분했다.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집값이 3.3m²(1평)당 3000만원 이상으로 황족에 속하는 강남권에서부터 시작해 2200만원대의 과천·송파·용산이 왕족으로 꼽힌다.
실제로 주소를 현대판 신분증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수도권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해 3수 끝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강모 씨(31·남)는 서울 강남구 소재 33m²(10평) 남짓한 원룸에 보증금 500만원, 월세 80만원을 부담하며 살고 있다. 80만 원이면 9급 공무원인 김 씨 월급의 절반 수준이다. 그는 “월세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강남에 산다는 자부심과 문화적 혜택을 고려하면 결코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어느 지역, 어느 도시에 사는 지에 따라 삶의 정체성이 차별화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젊은 층, 특히 대학생 층으로 내려갈 수록 심화되고 있다. 서울 소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임모 (27·남)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 보니 자신이 속한 동아리가 회원 감소로 문을 닫았다”며 “요새 신입생들은 동아리 활동보다 그 출신과 배경에 비슷한 또래끼리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해, 그들끼리의 캠퍼스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주거 양극화의 문제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단계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거주지 양극화가 사회문화적 양극화로 진행되는 단계에 본격적으로 접어든 셈이다.
서울 관악구가 지역 이미지 쇄신을 위해 신림 4동을 신사동, 신림6·10동을 삼성동으로 변경한 일이나, 양천구 신월·신정동을 ‘신목동’으로 바꾸려다 목동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일 등은 이미 ‘사는 동네’가 계급의 지표가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 서초구와 강남구의 20∼24세의 대학진학률은 각각 68.1%와 64.3%로 중랑구(37.8%) 강북구(37.2%)의 2배 수준이다. 또 부모 세대인 50∼54세의 대졸자 비율도 서초구, 강남구가 40.9%와 42.2%로 금천구(8.9%) 중랑구(8.6%) 강북구(8.8%)의 4~5배 수준이다. 전문 관리직 종사자 비율은 서초구, 강남구가 각각 22.7%와 21.9%로 금천구(10.3%) 중랑구(10.3%)의 2배 이상이었다.
한 사회의 수직 이동성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공교육이 그 기능을 잘 발휘하고 사교육의 영향력이 적은 경우에는 교육이 부의 대물림을 상쇄한다. 교육을 통해 계층 고착화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사교육의 영향력이 크고, 그 비용 또한 소득의 수준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날 경우 아이들이 받는 교육 역시 격차가 더욱 벌어져 교육이 부의 대물림을 강화하는 수단이 된다. 고소득층의 자녀들은 더 높은 교육을 받게 되고, 그래서 그들 자신이 고소득층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계층 고착화로 연결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상위 20%의 국민이 80%의 부(富)를 누리고 있다. 이른바 ‘2대 8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압축 성장의 과정에서 이 같은 소득불평등의 갈등구조가 뿌리를 내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강남과 강북,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맹목적 반목과 대립도 기본적으론 2대 8 법칙이 낳은 병폐다.
그나마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던 교육의 기회마저 빈부에 따라 양극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극빈층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아직 빈약하다.
빈부격차의 확대는 부의 축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빈곤층의 상대적 소외감과 박탈감은 부자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과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빈부 갈등의 해결은 조율은 시간이 지날 수록 풀기 힘든 난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