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 여기에 코드레드를 명한 이 기지의 사령관 제셉 대령이 증인으로 불려온다. 정장 군복의 당당한 모습에 넘치는 기백, 그 위에 감히 그를 증인으로 부른 데 대한 참기 힘든 노여움이 흐르는 모습이다.
증인석에 앉은 그를 애송이 군 법무관이자 변호인인 캐피 중위가 심문한다. 이들 두 병사에게 가혹행위를 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느냐? 피살자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기로 했다는 말이 거짓 아니냐?
경멸하는 눈으로 재판정을 노려보며 모든 것을 부정하던 그가 어느 순간 더 이상의 무례함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듯 격렬히 쏟아 놓는다. “너희 같은 놈들은 내가 지켜 주는 덕에 자유란 걸 누리고 사는 거야…. 그냥 감사히 여기면서 살기나 해…. 너희들이 말하는 같잖은 권리 같은 것은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격분한 그의 입에서 드디어 진실이 쏟아진다. “그래 했다. 내가 코드레드를 명령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나쁜 놈들. 나라가 어떻게 지켜지는 줄 알아. 그렇게 해서 나라가 지켜지는 거야. 알겠어?”
롭 라이너 감독의 1992년 영화 ‘어 퓨 굿맨(A Few Good Men)’의 장면들이다.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또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법이 정한 과정과 절차, 심지어 하늘이 준 권리마저 짓밟는 비뚤어진 애국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애송이 변호사 역에 톰 크루즈, 그리고 제셉 대령 역에 잭 니콜슨이 열연한 영화다.
잘못된 생각일까. 요즈음 이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디선가 모르게 이런 애국주의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여기저기 제셉 대령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애국은 고귀한 가치다. 특히 우리와 같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데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애국은 대단히 위험한 가치이기도 하다. 우선 개념과 내용이 모호하다. 그래서 그 속에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다. 이를테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도 애국이 될 수 있고,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을 하는 것도 애국이 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도그마에 빠져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 집단적 가치를 중시하는 가운데 개인의 가치와 절차나 과정이 지니는 가치를 간과하기 쉽다. 영화 속 제셉 대령이 바로 그 경우다. 국가 안보라는 집단적 가치를 앞세워 코드레드를 불법적으로 지시하는가 하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개인의 생존권과 존엄까지 스스럼없이 짓밟았다.
제대로 애국하는 사람은 스스로 애국자라 하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모호한 개념의 집단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도그마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또 자신이 추구하는 집단적 가치가 절차적 합리성이나 개인의 가치를 침해하는 일은 없는지 의심한다.
스스로를 애국자라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집단적 가치를 앞세우는 사람은 오히려 위험하다. 이미 도그마에 빠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나를 기소한다고? 웃기지도 않는군. 네놈들 머리통을 부숴 놓을 테다.” 법정에서 체포된 제셉 대령의 대사다.
우리는 꽤나 애국적인 국정원장을 두고 있다. ‘애국 전사 남재준!’ 세상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그는 가는 곳마다 애국과 집단적 가치를 이야기하고, 회식을 마친 뒤에도 애국가를 부르며 헤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집단적 가치를 앞세우는 조직에 다시 더 이상 애국적일 수 없는 수장이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애국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그에게서 제셉 대령의 모습이 보이는 걸까? 또 왜 간첩조작 혐의를 포함한 일련의 국정원 관련 사건들이 무슨 필연처럼 느껴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