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중학생 딸이 성폭행 당한 후 살해당했다면 아버지로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이성과 감정 사이에 놓인 한 아버지의 부성애를 소재로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아버지라면 법의 심판을 기다릴 것인가, 가해자를 찾아가 죽여 버릴 것인가.
배우 정재영은 ‘방황하는 칼날’에서 성범죄로 딸을 잃은 아버지 상현으로 분했다. 오열, 분노, 슬픔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촬영현장이었다. 지난해 영화 ‘열한시’ 이후 ‘플랜맨’, ‘역린’ 등 다작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는 정재영이지만 ‘방황하는 칼날’은 유독 특별하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다른 현장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영은 평소 유쾌한 성격과 달리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호탕한 웃음은 여전했지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이 바뀌었다. 25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누적 관객 수 4500만명을 앞두고 있는 ‘베테랑 배우’ 정재영에게도 ‘방황하는 칼날’의 주제는 차갑고 무거웠다.
“상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막상 표현하려니 정신적으로 힘들더라. 특히 영화 촬영 내내 감정을 쭉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다른 현장보다 많이 피곤하고 피폐해졌다. 상현의 감정은 느끼면 느낄수록 잘 모르겠더라. 추상적으로 다가왔다.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대사 없이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상현의 감정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방황하는 칼날’은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상현의 감정을 섬세하고 극단적으로 그리며 관객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내가 상현이라도 저렇게 하겠다’는 생각에 빠진다. 여기서 ‘동영상’이란 소재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딸의 성폭행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동영상을 아버지는 눈앞에서 목격한다. 그리고 가해자들을 한명씩 제거한다. 정재영은 “딸이 있었다면 이 작품을 못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상황에서 상현은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가해자와 맞닥뜨린 순간 죽이려는 의도가 있던 없건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실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질문을 참 많이 받는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이 다르다. 어떨 때는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고 말했다가도 현명하게 대처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또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상현보다 더했을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생각이 들지만 상현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방황하는 칼날’,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다보니 ‘참 힘든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정재영은 왜 이 영화를 선택했을까?’ 궁금해졌다.
“이 영화는 상현의 복수만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사법권을 가진 경찰 억관(이성민)의 심정도 설득력있게 반영돼 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성폭행범이면서 살인자인 중학생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서 억관과 신참 형사는 계속 충돌한다. 누구를 먼저 잡아야 하고, 한 사람만 구한다면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적 구성이 담겨 있다.”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의 방법인가요?” (딸을 잃은 상현이 경찰서에서 억관에게 한 대사), “걔들이 CSI야? 우릴 어찌 찾아”(성폭행 가해자들이 학교에서 한 대사), “6개월 살고 나오겠네”(억관이 미성년자 솜방망이 처벌을 한탄하며 한 대사), “이제 피해자 아닌 가해자야”(상현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신참형사에게 억관이 한 대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방황하는 칼날’은 우리 사회의 ‘구멍’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범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력 처벌을 말하기보다 사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도가니’도 그렇고, ‘부러진 화살’도 그랬다. 우울한 소재이지만 이런 영화들이 사회의 문제점을 표면으로 끌어내 공론화할 수 있다. 나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흥행 부담요? 왜 없어요!”
‘방황하는 칼날’의 개봉을 하루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인 만큼 흥행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4500만명을 동원한 배우인데다 연기 스펙트럼도 넓어 관객 수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흥행 부담은 당연히 있다. 영화가 잘 되어야 시나리오도 계속 들어오지 않겠나(웃음). 요즘 4500만명을 동원한 배우란 통계가 있는데 ‘많이 봤다’라기보다 ‘많이 했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정재영은 오는 30일 현빈의 제대 후 복귀작이자 조정석, 조재현, 한지민, 김성령, 정은채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상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평가 받는 ‘역린’으로 또 다시 관객 앞에 선다. 극중 역할은 ‘내시’. 연기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재영 다운 선택이다.
“그동안 작품을 따져보니 근 10년 동안 1년에 평균 1.5편정도 했다. 그런데 작년 말부터 올해까지 벌써 4편을 하게 됐다. ‘내가 살인범이다’와 ‘열한시’ 사이의 공백기가 길었다. 요즘처럼 작품을 많이 하면 더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