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張英姬·1952~2009)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대중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간 수필가, 세 차례의 암 투병 기간에도 집필과 강의를 멈추지 않았던 영문학자이자 번역가로 알려져 있다. 1952년 9월 14일 서울에서 영문학자 장왕록(張旺祿)의 딸로 태어났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으나 가족의 후원과 자
식민지 시기부터 1980년대까지 방대한 대중소설과 역사소설을 쓴 작가이자 언론인이며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된 인물이다. 장덕조(張德祚·1914~2003)는 1914년 10월 13일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 필명은 춘금여사(春琴女史), 일파(一派)다.
1920년 대구여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6년 과정을 마치고 1927년 대
한국 근·현대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하소설 ‘토지(土地)’, 전후 한국 사회의 현실을 여성의 시각에서 그린 ‘시장(市場)과 전장(戰場)’, ‘표류도(漂流島)’의 작가. 바로 박경리(朴景利)이다.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즈
김말봉(金末鳳·1901~1961)은 식민지 시기를 대표하는 대중소설 ‘찔레꽃’의 작가이자 해방 후 공창 폐지운동을 주도한 실천가이다. 190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함양군 안의면에서 성장했다. 본명은 말봉(末峰), 필명은 말봉(末鳳), 보옥(步玉)이다. 부산의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거쳐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1919년에 졸업했다.
그
식민지 노동 현실을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는 ‘인간문제(人間問題)’의 작가 강경애(姜敬愛·1906~1944)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듬해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장연(長淵)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게 된다. 열 살이 지나서야 장연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비와 학용품조차 마련하기 힘들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고명딸로서 황실뿐만 아니라 국민의 큰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옹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고종은 1916년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옹주가 다닐 수 있게 하였다. 왕녀 중 공식적으로 유치원에 입학한 사람은 덕혜옹주가 처음이다.
덕온공주(德溫公主·1822~1844)는 1822년(순조 22) 6월 10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와 순원왕후의 3녀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1829년(순조 29) 8세 때 ‘덕스럽고 온화하다’는 의미의 ‘덕온(德溫)’이라는 이름을 받아 정식으로 공주에 책봉되었다.
16세 되던 1837년(헌종 3) 8월 13일 생원 윤치승(尹致承·1789~1841)
강완숙(姜完淑·1760~1801) 골롬바(葛隆巴·Colomba)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양반가문의 서녀로 태어나 덕산(德山)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의 후처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용렬하여 항상 우울한 나날을 보내면서 속세를 떠날 생각을 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시댁 사람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접하고, 예산에 살던 공씨(孔氏)
향랑(香娘·1682~1702)은 경상도 선산부 상형곡(현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 살던 양인 박자신(朴自申)의 딸이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자라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정숙하고 효순하였다. 날이 갈수록 계모의 박대가 심해졌으나 조금도 성내는 기색 없이 그 뜻에 순종하였다. 17세인 1699년(숙종 25)에 같은 마을에 사는 임천순(林天順)의 아들
우열녀의 이름은 말질진(末叱眞)이다. 1657년(효종 8)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동촌(東村) 점지동(店池洞)이라는 궁벽한 시골마을에서 목수의 딸로 태어났다. 21세 때 안동인 김덕립(金德立)과 혼인하였다. 시부모로부터 “우리 현부(賢婦)”라는 칭찬을 받으며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1683년(숙종 9) 어느 날 갑자기 침입한 도적
무안군부인 박씨(務安君夫人 朴氏·1249~1318)는 현재의 전라남도 무안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밀직부사 군부판서 상장군(密直副使 軍簿判書 上將軍) 박부(朴琈), 어머니는 협계군부인(俠溪郡夫人) 선씨(鮮氏)이다.
부인은 23세에 해주 최씨 최서(崔瑞)와 혼인했다. 최서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고, 또 관리가 될 재간을 갖추고 있었다. 벼슬자리에 나아간
신씨(辛氏·1367~1382)는 영산(靈山·현재의 경남 창녕군 영산면) 사람인 낭장(郞將) 신사천(辛斯蕆)의 딸이다. 신사천은 만년에 고향에 내려와 퇴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왜구의 침입이 매우 빈번하였다. 왜구는 경제적 곤궁 등의 이유로 1350년(충정왕 2)부터 공민왕 재위 23년간 115회,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고려를 침략하였다. 경상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1315)는 충선왕의 왕비이다. 이름은 보탑실련(寶塔實憐)이며, 원나라 진왕(晉王)의 딸이다. 1296년(충렬왕 22) 충선왕이 세자 시절 혼인하여 1298년 고려에 왔다. 그 해에 충선왕이 충렬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공주의 궁을 중화궁(中和宮), 부(府)를 숭경부(崇敬府)라 하였다.
충선왕에게는 계국공주와 혼인
조비(趙妃·생몰년 미상)는 충선왕의 왕비이다. 상원군(祥原郡·황해북도 상원군) 사람으로 아버지는 역관(譯官)으로 크게 출세한 조인규(趙仁規), 어머니는 조온려(趙溫呂)의 딸이다. 1292년(충렬왕 18)에 세자 충선왕과 혼인하였다. 충선왕은 이미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으니, 1289년 혼인한 종친 서원후(西原侯)의 딸 정비(靜妃) 왕씨, 이듬해 결혼한 남양
백야단(白也丹·?~1297)은 충렬왕의 후궁이다. 태산군(泰山郡·현 전북 정읍) 사람인 시씨(柴氏)의 딸로서 처음에 궁인으로 입궁하였다. 일명 무비(無比)라고도 불리는데, 무비란 비교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예전에 의종(毅宗)의 궁인에도 무비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미모로 왕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백야단을 무비라고도 부른 것은
평량(平亮)의 처(생몰년 미상)는 소감(少監) 왕원지(王元之)의 집 여종이었으며,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金永寬)의 노비였다. 평량은 견주(見州·현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자가 되었다. 고려시대에 노비는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率居)노비, 따로 거주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외거노비는 소작인 비슷한 존재였다. 즉 주인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
수원 권씨(脩媛 權氏)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의 후궁으로, 법호(法號)는 수원(秀圓)이다. 후궁의 품계 중 하나인 수원(脩媛)은 정2품에 해당된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없다. 9세기 중후반에 최치원이 찬(撰)했다고 알려진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를 비롯한 불국사 관련 자료 중 ‘화엄불국사비로
김정란(金井蘭)은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대 여성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원성왕 8년(792) 음력 7월에 신라는 당에 미녀 김정란을 헌상하였다.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김정란은 몸에서 사람을 매혹하는 향기가 났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전한다. 원성왕이 어느 날 황룡사 스님 지해(
계화왕후(桂花王后)는 신라 39대 소성왕(昭聖王, 재위 798~800)의 왕비이고, 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의 어머니이다. 김씨이고, 대아찬 숙명(叔明)의 딸이다. 숙명은 또한 ‘삼국유사’에는 숙명(夙明)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동일 인물이다.
소성왕은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장손이다. 원성왕은 맏아들
성목태후(聖穆太后)는 김씨이고,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맏아들인 인겸(仁謙)의 부인이다. 인겸은 원성왕 즉위 직후인 786년에 왕태자로 책봉되었으나 791년(원성왕 7년)에 죽었다. 이듬해인 792년에 그의 형제인 의영(義英)이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의영 역시 794년에 죽었다. 이에 796년에 인겸과 성목태후의 맏아들인 준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