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세계에 형님이 있다면 여자에겐 ‘언니’가 존재한다. 손위 여성을 존중하는 의미가 담긴 말로 정겨움이 느껴진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언니가 중성어가 됐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언니라는 호칭이 입에 뱄다. 식당은 물론 백화점·카페 등에서도 종업원에게 말을 걸 때 나이와 상관없이 ‘언니’를 편하게 쓰고 있다. 심지어 요즘 몇몇 남자 대학생은 여자 친구나 여자 선배 얘기를 할 때 “우리 언니가…”로 시작한다. 이야기를 듣는 이들도 자연스럽다. 술과 후배를 무척이나 아껴 ‘K사모(K국장을 사랑하는 모임)’까지 거느리고 있는 대선배(73세)께선 타인에게 친근감의 표시로 ‘언니’라 부른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가씨’란 호칭은 왠지 함부로 대하는 느낌이 들어 피하고 있다고도 했다.
언니란 호칭이 남녀 불문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물론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유는 어원에서 찾을 수 있다. 언니는 손윗사람을 부르는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훈민정음을 암글, 언문 등으로 비하하면서 언니 대신 한자말인 형(兄)을 썼다. 자연스럽게 언니는 신분이 낮은 계층이나 여자들 사이에서만 사용됐다. 이후 세월 속에서 태어나고, 변화·성장하고, 소멸하는 말과 글의 특성상 언니는 여자 사이에서 손윗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하지만 남녀 손윗사람을 부르던 흔적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의 졸업식노래 1절을 보자.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여기서 언니는 여자 선배뿐만 아니라 모든 선배를 의미한다. 1970~80년대 큰 인기를 끈 고 길창덕 화백의 명랑 만화에도 손위 남자에게 언니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 이뿐인가. 2010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추노’는 남자끼리의 ‘언니’ 호칭으로 관심을 받았다.
한글학자들은 언어의 변화를 받아들여 언니는 여자의 손위 형제를 이르거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를 높여 정답게 부를 때만 사용해야 한다며 ‘언니’ 호칭을 남발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어머니 같은 식당 주인에게 딸뻘인 젊은 여자나 비슷한 나이의 남자가 ‘언니 언니’ 하는 건 몰상식해 보일 뿐 다정함의 표시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원뜻과 전혀 다른 뉘앙스로 은연중 하대에 가까운 호칭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호칭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는 시 ‘꽃’에서 호칭은 상대방을 꽃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마법이라 말한다. 옳거니! 이제 식당·백화점·미용실 등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는 명찰을 살핀 후 이름에 ‘~씨’나 ‘~님’을 붙이자. 특히 남자들은 언니란 호칭을 여자에게 양보하자. 식당의 경우 종업원 대부분이 명찰을 달지 않는데 어찌하냐고? ‘사장님’, ‘여사님’ 등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자. 반찬 하나라도 편안하게 더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