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결산 기업의 올해 정기 주주총회는 여느 해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먼저 정부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본격화되면서 기관과 개인투자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배당 확대를 요구하거나 사내ㆍ외 이사선임에 과감히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다만 자본시장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에는 이견이 없다. 그만큼 이제껏 국내 주요기업의 정기주총이 형식적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밖에 전자투표제의 활성화로 소액주주의 목소리도 커졌다. 경영진과 주주가 만나는 콘서트 형식의 주총도 처음으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기관투자자의 반격 “더 이상 잠자코 있지 않는다”=올해 주총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기관투자자의 제 목소리 내기’였다. 결과적으로 예상했던 만큼의 적극적인 의결권을 행사는 없었다. 반대의사를 밝히는 수준에서 입장 표명을 가름했다. 나아가 반대 의결권을 내세웠더라도 관철된 경우는 없었다.
다만 주요 기업의 총수보다 지분이 많은 국민연금과 기타 연기금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선 점은 주목할 만하다.
먼저 연기금, 그 가운데 국민연금이 주총에 앞서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 의지를 내보인 점도 큰 변화였다. 굴리는 돈만 400조가 넘는 만큼 정부의 ‘배당확대’ 전략에 가장 어깨가 무거웠던 기관투자자였다. 웬만한 연기금 몇 곳의 지분을 모두 합해도 국민연금의 운용규모를 따라갈 수 없는 만큼 국민연금의 행보에 큰 관심이 모아졌다.
국민연금은 일찌감치 외부 자문기관을 선정했다. 이들로부터 의안에 대한 분석결과표도 받았다. 의안을 분석했던 자문기관 역시 자본시장의 뒤바뀐 분위기에 발맞춰 냉철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정부 정책에 힘입어 기업에 배당 강화를 요청하거나 주주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냈다. 이들 분석기관은 주총에 앞서 분석결과를 사전에 공표하면서 분위기를 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국민연금은 주요 기업의 주총에서 이사선임 반대와 정관변경 반대의 목소리를 내놓지 않았다.
국민연금 기금운용 관계자는 “의안분석기관의 분석결과를 참고했고 입장을 정리했다”며 “결과를 참고해 의결권 위원회가 입장을 정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현대모비스를 포함한 일부 기업에서는 사외이사 선임에 반대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다만 나머지 주주들의 찬성표에 가려 큰 힘을 내보이지는 못했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도 주총 앞두고 ‘꿈틀’=이 같은 움직임은 정부 산하기관을 넘어 일반 증권사와 운용사에서도 일어났다. 대신경제연구소는 본격적인 주총에 앞선 지난 9일 총 126개사의 안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롯데쇼핑이 상정한 배당 및 이사선임 안건에 대해 반대 의결권 행사를 권고하기도 해 눈길을 끌었다.
김호준 대신경제연구소 지배구조연구실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11개사의 이사를 겸직하고 있어 이사의 의무를 충실하게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이에 대한 회사 측 해명도 불충분했다”고 밝혔다.
이밖에 대신측은 △한국전력 부지 고가 매입 결정에 관여한 현대자동차ㆍ현대모비스ㆍ기아자동차의 이사 재선임 △삼성SDS 지분 저가 매각 결정에 관여한 삼성전기의 이사 재선임 건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했다.
증권사들은 지금까지 보고서 하나에서도 기업들 눈치를 살펴왔다. 그런 와중에 대신경제연구소가 보기 드물게 기업을 정면으로 겨냥한 셈이다.
이밖에 KB금융지주와 하나금융지주 등 주요 금융권 주총에서는 경영진이 내놓은 안건이 일부 주주들의 반대에도 대부분 무사통과되기도 했다.
기관투자자와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확대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들의 의견이 주총장 곳곳에서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
◇소액주주, 사외이사 바꾸고 현금배당 확대=반면 중소 상장사의 경우 적잖은 실효를 거둔 주총장도 있었다. 지난 27일은 810여개 상장사가 주총을 열었다. 이른바 ‘제3차 슈퍼주총 데이’였다.
이날 자동차부품 기업 부산주공 주총에서 당초 사측이 상정한 사외이사 대신 소액주주들이 선임한 사외이사가 선임됐다. 이 회사 소액주주들은 기업지배구조 컨설팅업체와 협력해 30%가 넘는 의결권을 모았고 세무법인 신성의 대표이사인 이종경 씨를 부산주공의 사외이사로 추천하고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사측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밖에 삼양통상 주총에서는 비상근감사 후보로 나선 소액주주 강상순 씨가 감사에 선임됐다. 이 회사 소액주주들은 경영 투명성 제고를 요구하며 강 씨를 대표로 추대했고 사측이 이를 받아들인 셈이다. 소액 주주들의 목소리가 모여 사외이사를 갈아치운 이례적인 경우다.
영화금속의 경우 슈퍼개미 손명완 씨의 주주제안으로 배당금이 당초보다 확대됐다. 전자투표제를 도입하면서 손씨 의결권에 힘을 실어준 소액주주들이 한몫을 했다. 회사 지분 약 10%를 거머쥐고 있는 슈퍼개미 손명완 씨에게 주주들이 17%의 지분을 몰아주면서 손 씨의 발언권이 커졌던 경우다.
당초 회사측이 제시한 1주당 배당액 25원은 손명완 씨와 소액주주의 요구에 따라 50원으로 확대됐다. 전자투표의 힘이 컸다.
◇자본시장 새 패러다임 알리는 첫 걸음=이제껏 자본시장의 정기주총은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중소 상장사의 경우 폭언과 고성이 오고가는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다만 대기업을 비롯한 중견기업 주총은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가 각 기업에 배당확대를 요구했고 이에 대한 인센티브도 제안했다. 배당확대를 위해 기관투자자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소액주주들도 전자투표제도를 십분 활용해 보다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서고 있다.
그 덕에 이제껏 “주면 고맙고 안주면 서운한” 수준에 머물렀던 배당금도 확대되는 결과를 얻어냈다. 지난해 12월부터 2월까지 2014년분 현금배당을 공시한 상장법인 수는 714개사. 이는 전년대비 9.8%(64개사) 증가한 규모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포함한 대장주도 배당확대에 앞장섰다. 삼성전자의 경우 연간 현금배당 총액이 3조원으로 전년(2조1570억원)보다 39%가량 증가하기도 했다.
총 배당금도 많아졌다. 전년 10조9398억원에서 지난해에는 14조1429억원으로 총 3조2031억원 늘었다. 증가 비율은 29.3%에 달했다.
유가증권시장 배당총액이 1년 전보다 28.9%(2조9831억원), 코스닥시장은 35.7%(2200억원) 증가했다. 배당을 공시한 기업 수는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 시장이 각각 6곳과 58곳 늘었다.
이처럼 주요기업들이 배당 확대에 나선 이유는 정부의 인센티브 정책도 한 몫을 했다. 배당 확대가 가계소득에 연결될 수 있으리라는 정부의 기대치도 이를 뒷받침했다.
올해 주총은 이처럼 작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향후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변화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훗날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더욱 뚜렷해졌다. 올해 주총은 결과를 넘어서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