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죠. 관피아보다 전문성 없는 정피아가 더 문제예요.”‘A금융지주 임원’
관피아 논란의 틈을 이용해 정피아(정치이+마피아)들이 금융권에 파고들고 있다. 세월호 사태 이후 본격화된 ‘적폐청산’ 노력이 엉뚱하게 샛길로 빠져 정피아들에게 부활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이들은 관피아들보다 ‘낯’이 더 두껍다. 전문성을 요하는 자리에 관련 지식도 없이 고개를 들이민다. 자산관리공사, 예금보험공사 등 금융공기업은 물론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은행, 대우증권 등까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다.
전문가들은 정피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고경영자(CEO), 사외이사 선임 과정에 주주의 목소리를 더 많이 반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또 전문성을 갖춘 인력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관료 출신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정치권 이용 금융권 감사·사외이사 낙하산 = 올해 금융권 주주총회 화두 중 하나는 정피아였다. 대선 캠프에 몸 담았던 몇몇 인사들과 전직 의원들이 금융권 요직으로 내려왔다.
특히 발 들이기 가장 쉬운 금융공기업이 첫번째 타깃이다. 기술보증기금의 박대해 감사는 2008년 총선 때 친박연대로 당선,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강석진 기술보증기금 상임이사 역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비서실장 출신이다.
공명재 수출입은행 감사는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 서울지역 협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박근혜 대통령 후보시절 대선 캠프 ‘힘찬경제추진단’ 위원이었다.
정부가 대주주인 은행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은행은 신규 사외이사 4명 중 3명이 정치권과 관련이 있다. 정한기 호서대 교양학부 교수는 2012년 19대 총선 때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에 공천 신청을 했으며 홍일화 우먼앤피플 고문은 한나라당 부대변인을 지냈다. 천혜숙 청주대 교수의 남편은 이승훈 청주시장(새누리당)이다. 재선임된 정수경 감사는 지난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를 맡았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에는 박근혜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의 이수룡 감사와 이명박 대통령기념재단 이사인 한미숙 사외이사가 재직 중이다.
시중은행도 정피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은행 사외이사로 선임된 김우찬 법무법인 한신 대표변호사는 2012년 19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클린공천지원단’에 몸 담았으며 현재도 새누리당 추천으로 국회 개인정보보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전문성 결여·업무는 뒷전 문제 = 문제는 이들이 금융경력이나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말그대로 보은인사다. B은행 감사인 ㄱ씨는 임원들과의 첫 상견례 자리서 “금융은 잘 모른다. 대신 정치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자신의 역할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게다가 이들은 업무에 대한 관심도 없다. 금융회사 감사나 사외이사 자리를 정계 진출의 징검다리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수억원에 달하는 보수를 받으면서도 정치권 경조사나 외부행사를 더 챙긴다. 실제 농협금융지주 사외이사로 활동하던 이만우 전 고려대 교수는 2012년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의원이 됐다.
더욱이 그 출신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관피아와 정피아들의 자리 보전은 매우 비밀리에 진행된다. 기업신용평가를 맡는 한국기업데이터는 지난해 말 사장 후보 승인을 위한 주총를 열었다가 내정자가 주총장에 나타나지 않는 촌극을 겪었다. 사장으로 내정된 김정인 코리아크레딧뷰로(KCB) 연구소장이 “사장에 내정된 줄도 몰랐고, 할 생각도 없다”고 자리를 거부한 것이다.
김 소장이 2013년 청와대 금융인 모임에 참석한 것이 발단이 됐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정치권과 금융권에서 김 소장을 공기업 수장으로 앉히기 위해 본인 의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일을 추진하다 이같은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낙하산 문제는 하루 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자격 요건을 강화하고 공공기관 최고경영자(CEO) 등의 선임에 주주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피아는 관피아에 비해 전문성이 부족하다”며 “상법이나 공공기관 관련 법에 CEO나 사외이사, 감사 등에 대한 소극적 요건과 적극적 요건을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