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옥이 청나라로 건너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베이징에 동행한 적이 있는 한 문상(文上)이 이번에는 배탈이 났다며 함께 가기를 주저했다. 이 문상은 앞서 베이징에 갔을 때 도적을 만나서 갖고 있던 장사 밑천을 모두 털린 적이 있다. 운 좋게 그와 거래를 자주 하던 호상(胡商)은 훗날 갚으라며 선뜻 장사 밑천을 대줬다. 문상에겐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이제 와 돈을 갚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장삿길을 꺼리는 것이었다.
문상은 뻔뻔하게도 “혹 그 호상이 제 안부를 묻거든 중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면 그만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임상옥은 문상을 괘씸히 여기며 홀로 베이징에 당도했다. 그러다 하루는 문상에게 돈을 대준 그 호상이 처연한 얼굴빛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내 들으니 먼저 내가 장사 밑천을 조금 마련해 준 그 문상이 급살 병으로 죽었다더군. 아까운 인재를 놓쳐서 정말 섭섭하이. 우리네 장사 풍습에 한 번 그 사람이 눈에 들면 밑천을 대줘서 뒤를 밀어줄 뿐더러, 실패해서 본전을 날려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 데… 참 아까운 사람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호상은 임상옥에게 문상 장례비 조로 은자까지 건넸다. 임상옥은 차마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어 그 은덩이를 받아 조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호상의 말대로 문상은 진짜 고인(故人)이 돼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과연 자기가 앞세운 말대로 죽었구나.” 임상옥은 착잡한 심정으로 베이징서 가져온 장례 비용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통곡하는 상주를 위로하며 빈소를 나온 그는 참 말 한마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빌미’가 될 만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다니…”
임상옥의 이 일화는 ‘말이 씨가 된’ 일례인 동시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의 역설이다. 인종 차별 발언과 노인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새누리당 김무성·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김 대표는 18일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함께한 흑인 유학생에게 “연탄 색깔하고 얼굴 색깔이 똑같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20일 ‘박근혜 정부 복지 후퇴 저지’ 토크 콘서트에서 “어르신들은 잘못된 정책으로 (자신들이) 가장 고통을 받는데도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어르신들에겐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정치인의 말은 정치적 수준을 나타낸다고 했다. 우리의 정치 수준이 딱 이만큼인가 보다.
잊을만 하면 터져 나오는 정치권의 설화로 국민의 염증도 커져만 간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신뢰마저 무너질 지경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국민에게 말로나마 웃음을 줘야 하는 게 정치인의 역할 아닌가. 정치인이 뱉은 말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돼 있다. ‘세 번 생각한 후에 한 번 말하라’는 공자의 삼사일언(三思一言)을 되새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