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도입된 공매도 잔고 공시제 시행 이후 업계에서는 잦은 혼란이 예상된다며 침울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공매도 잔고 공시제란, 특정 기관이나 개인이 개별기업 주식을 0.5% 이상 공매도하면 투자자 신원과 잔고 내역을 공시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공시요건 발생 후 3거래일 뒤부터 공시가 이뤄지기 때문에 이달 5일부터 대량 공매도자 실명이 공개된다.
제도 시행이 가시화되자마자 시장은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실제 제도가 시행된 첫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망설에 대한 루머가 SNS상에 오전부터 나돌면서 삼성물산 주가는 장중 한때 8.5% 이상 급등했다. 물론 이 회장 사망설은 거래소 조회공시까지 들어가고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업계 일각에서는 신원 공개를 꺼린 공매도 투자자들이 ‘숏커버링(공매도 청산을 위한 주식 매수)’에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누군가 주식을 먼저 사둔 뒤 악성루머를 퍼뜨린 것 아니냐는 지적을 제기했다.
공매도는 일반적으로 주가 하락을 예상하고 주식을 빌려서 파는 투자 기법이다. 향후 주가가 하락하면 숏커버링으로 공매도 분을 상환하고 시세 차익을 얻기 때문에 이 같은 시장의 혼란을 이용한 투기 세력들이 당분간 극성을 부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된 셈이다.
시장의 혼란과 더불어 그간 양방향 운용 전략인 롱쇼트 전략을 사용하던 헤지펀드나 관련 운용사도 당혹스러운 모습이 뚜렷하다.
통상 공매도는 시장의 정보를 주가에 보다 효율적으로 반영케 하고 다양한 투자 기법과 리스크 헤지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때문에 개인투자자의 접근이 어렵지만 시장 효율성 차원과 자본시장의 질적 발전 측면에선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이번 공매도 잔고 공시제로 관련 내역이 노출될 경우 개인투자자들의 비난 등으로 인해 사실상 운용에 어려움이 따른다며 운용사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개미투자자들은 특정 종목의 공매도 비율이 높아지면 주가 하락 폭이 커지는 만큼, 공매도가 주가 급락을 부추기는 주범이라고 여겨 공매도 폐지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운용업계에선 앞으로 자산 규모가 커질 경우 전략상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토로했다. 익명을 요구한 헤지펀드 매니저는 “주식을 차입하기 어려워지면서 롱쇼트 전략 자체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며 “또한 펀드 규모가 큰 경우엔 이를 합산해서 공매도 포지션을 산출하기 때문에, 실수로 며칠만 공시를 못 하더라도 하루에 1000만 원씩, 3일이면 3000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업계 고위 관계자도 “공매도 주체 세력에 대한 인적사항 공개는 해외에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과도한 규제”라며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이 우려된다”고 귀띔했다.
기본적으로 개인투자자들과 공매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방안에는 업계도 수긍하지만 이를 누가, 얼마큼 팔았는지 낱낱이 공개하는 것이 과연 좋을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최소한의 익명성도 보장되지 않는 시장에 누가 섣불리 투자를 하겠는가. 금융 선진국 홍콩 역시 종목에 대한 공매도 잔량을 1주 단위로 공시하고 있지만 해당 공매도 주체에 대한 공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 역시 일간 공매도 수량과 거래 내용은 공시 대상이나 공매도 주체 관련 사항은 공개하지 않는다. 시장이 성숙해지기 위해선 투자자들의 알권리도 중요하지만 자본시장 플레이어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필요하다. 거꾸로식 규제에 갇혀 또다시 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될까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