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또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國歌)로 불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휘자이자 첫 첼로 독주회를 연 뮤지션이다.
평양 출생인 안익태(1906. 12. 5~1965. 9. 16)는 숭실중학교 때 3·1운동에 가담해 퇴학당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라 첼로를 전공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 동양인 최초로 신시내티교향악단 제1 첼로주자로 활약하고 필라델피아의 카네기 리사이틀홀 등에서 첼로 독주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안익태는 193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바인가르트너에게 베토벤 음악을 배우며 지휘 및 작곡 공부를 했다. 이때부터 그의 친일행적이 시작됐다고 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활동하고 일본 국가를 연주한 사실이 있다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 명단에 올린 바 있다. 또 ‘만주 환상곡’에 직접 선율을 넣어 대형 일장기가 걸린 콘서트홀에서 지휘했다고 한다. ‘만주 환상곡’은 일본과 만주국의 영광을 기리고 독일 이탈리아의 건승을 비는 내용이 담긴 곡이다.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불리던 것을 탄식하던 안익태는 이 당시 ‘애국가’를 작곡했다. 그리고 ‘애국가’를 주제로 우리나라 역사를 음악으로 표현한 교향곡 ‘한국환상곡’을 1938년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이 초연했다. 안익태의 ‘애국가’가 1935년 12월 시카고한인교회에서 처음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1965년 7월 런던 로열 엘보트홀에서 ‘애(哀)! 강상의 의기 논개’를 마지막으로 지휘하고 59세를 일기로 영영 지휘봉을 놓았다. 안익태의 유해는 1977년 서울현충원으로 옮겨졌으며 2009년 별세한 스페인 부인 로리타 안도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