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하늘을 우리가 만든 우리의 비행기로 지키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비통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한국전쟁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공군의 아버지’ 최용덕(1898.9.19~1969.8.15)은 비행기 제작이야말로 공군 강화의 길이라 생각하고 항공창을 설치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953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비행기가 창공을 가르게 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부활(復活)’이라는 이름을 짓고 친필 휘호를 전달했다.
최용덕은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간부로 활약하는 한편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또한 중국 공군군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조종사로 복무한 그는 중국 항공대 창설 멤버로 추대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때는 중국군에 적을 두면서 광복군 사령관으로 활동했고 광복군 비행대 창설 계획에도 협력했다.
해방 이듬해 최용덕은 항공건설협회 회장으로 추대돼 공군 건설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미군이 보병학교 입대를 강요하자 그는 “공군 창설의 대의를 위해 한마음으로 백의종군하자”며 ‘이순신의 백의종군론’으로 창군 주역 7인을 설득했다. 그들이 1948년 5월 5일 창설한 통위부(현 국방부) 직할 ‘항공부대’, 이것이 공군의 시초다.
한국전쟁 때 50대의 노장임에도 공군사관학교장으로 김포경비사령부를 편성해 김포기지를 방어했으며 공군의 항공작전을 총괄하기도 했다. 그는 1954년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체신부 장관, 중화민국 대사 및 외교부 고문직을 역임한 후 재야로 물러났다.
최용덕은 어려운 지인들을 도우면서도 자신은 전셋방에서 살았다. 그나마 공군 후배들이 마련해준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광복절 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하늘로 떠났다. 공군회관 옆 옛 집터 자리에 그를 기리는 기념탑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