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힐러리 패배의 교훈

입력 2016-11-3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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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당선 직후 카카오톡 메신저에서 떠다니던 유머 중 하나다. “한국의 여성 대통령이 ‘역시나 여성은 별수 없구나’를 확인해 줌으로써 트럼프 당선에 일조했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트럼프 당선보다 힐러리 패배에 더욱 큰 충격을 받았던 국내 페미니스트들의 첫 반응은 ‘흑인은 되지만 여성은 안 되는구나’였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참정권을 인정받은 해가 1870년이었던 반면, 여성은 치열한 투쟁 끝에 192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참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역사가 다시금 상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한데 이번 힐러리의 패배 속엔 여성이 마지막 유리천장을 뚫지 못했다는 사실 이상의 교훈이 담겨 있다. 물론 힐러리가 여성이란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다음의 글은 이 사실을 풍자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러분,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와 마약 중독자처럼 코를 킁킁거리는 여성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뿐입니까? 3명의 남자와 결혼해서 5명의 자녀를 둔 여성, 결혼 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불륜을 저지른 여성, 수차례 파산을 하고 국가에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여성, 수천 명의 가족이 보금자리를 잃은 채 거리에 나앉게 된 위기를 일으킨 주범인 여성, 이런 여성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가지 더 있네요. 지금까지 공직에 오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여성!”

이 글은 ‘트럼프’라고 쓰였던 곳에 ‘여성’을 대입한 글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런 여성이 대통령 후보에 지명될 가능성은 0%지만, 남성인 트럼프는 당당히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던 현실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후보자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분명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힐러리의 패배가 주는 진정한 교훈은 여성이란 사회적 소수 집단이 주류가 주도해온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주류 집단엔 없는 특별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8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짧은 정치 경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확고한 비전과 유권자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이끌어낸 탁월한 도덕성을 보여줌으로써 당당히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반면 힐러리는 그녀만의 장점이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하는 역설을 보여주었다. 국무장관으로서의 경륜은 이메일 스캔들로 이어져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낙인이 되었고, 강연 시 천문학적 몸값을 받았던 유능함은 대중들로부터 위화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일찍이 퍼스트레이디를 거쳐 국무장관에 오르면서 쌓아온 인지도는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할 것이란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신선함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힐러리의 실패가 곧 여성의 실패로 인식된다는 사실도 귀중한 교훈이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주관적 객관화(subjective objectification)’라 한다. 만일 트럼프가 실패했다면 그건 트럼프 개인의 문제이지 남성 집단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지만, 오바마가 실패했었더라면 그건 흑인 집단 전체의 문제가 된다는 의미이다. 힐러리의 경우, 힐러리가 여성을 대변하는 대표 선수가 되어 마치 여성은 누구든 대통령이 되기엔 근본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데 기여한 셈이다. 한국에서도 앞으로 오랜 기간 여성 대통령을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푸념이 나오는 배경도 ‘주관적 객관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 집단의 일원은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과잉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진한 여성들의 경우 남성보다 더 ‘남성적’ 행동을 하는 ‘독종여성’들이 많다거나, 여성 정치가 중엔 남성 중심의 정치 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돌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은 익숙한 풍경이다.

결국 힐러리의 패배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란 사실보다 ‘어떤 여성’이었는가가 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깨우쳐 주었다는 데서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이제 ‘어떤’의 자리를 진정 ‘어떠한 덕목’으로 채워야 할지 여성 모두의 성찰이 깊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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