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일본이나 유럽 등에서는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유서 쓰기, 자신의 장례식 체험하기 등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엔딩 노트 등 죽음 준비 상품까지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우리 역시 고령화사회에 접어들었고 ‘잘 죽을 권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연명 치료 여부 등을 명시한 사전의료의향서와 장례식 형태, 제사 여부 등을 적시한 사전장례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건강할 때 인생을 돌아보며 체계적으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엔딩 노트를 쓰는 사람도 많아졌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압축 성장과 치열한 경쟁,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잘 죽을 권리에 대한 인식이 부재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기도 힘들었다. 이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에 직면할 때 마지막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가족과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가족 간의 재산싸움 등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호스피스 병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의 이창재 감독은 “대부분의 사람은 시속 100㎞로 달리는 차의 속도를 계속 유지하게 하다가 급정지시키듯이 죽음을 대한다. 급정지시킨 차가 폭발하거나 충돌하면 운전자도, 그 주변의 사람들도 다 다친다. 차를 천천히 세우듯, 우리도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잘 죽는 것(Well Dying)이 잘 사는 것(Well Being)’이라는 말이 있다. 죽음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치열하고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 가장 중요한 도구이고 죽음 앞에선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
‘담론’ 출간, ‘처음처럼’ 개정증보판 원고 작업, 성공회대학 강의, 평화의 소녀상 글씨 쓰기…. “소중한 것을 찾지 못하고 뒤돌아보며 떠나는 모든 죽음은 결코 삶을 완성할 수 없다”라고 평생 강조한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가 2014년 피부암 판정을 받고 2016년 1월 15일 사망하기까지 투병하면서 한 일들이다.
‘손녀와 마음껏 놀아보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았던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가족과 여행하기’, ‘장례식장 사전 답사’….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의 주인공,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69세의 가장 스나다 도모아키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고통의 병상에 눕거나 불공평한 죽음에 분노하는 대신 자신이 평소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일들을 하며 죽음을 맞았다.
육신과 정신이 건강할 때 죽음을 생각하고 체계적으로 준비하며 채워 나가는 ‘엔딩 노트’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해주는 새로운 인생의 ‘오프닝 노트’이다. 당신은 48시간밖에 살 수 없다면 지금 무슨 일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