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 한복미인은 누구야? 박지영이잖아. 옷맵시가 살아 있네” “어라, 김해림, 장수연, 박성원도~. 한복이 저렇게 예쁠 수가 있어?.”
드레스를 입고 시상에 나섰던 다른 선수들도 모두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특히 이날 상금왕을 비롯해 5관왕을 차지한 박성현(23)은 한복을 입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누가 만들었을까. ‘한복 아티스트’ 김태원 ‘봅데강’ 대표의 작품이다. 봅데강은 ‘보셨는가요’의 제주도 사투리다. ‘10월의 신부’ 미녀프로골퍼 허윤경(26)이 결혼식 때 입은 한복도 그가 만든 예복이다.
클럽을 잡은 것은 2012년이지만 프로골퍼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해부터다. 비단 골프뿐 아니라 이창현 이사덕에 야구 등 스포츠 스타들과도 친분이 생겼다.
지금이야 잘 나가는 청담동의 한복전문점을 운영하지만 그는 뼛속부터 ‘흙수저’였다. 고향이 제주도다.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6남매 중 셋째였다. 출발은 한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고교도 토목과를 다녔다. 중·고교 다닐 때 교통비가 없어서 걸어 다녔다. 엄마가 옆집에서 차비를 빌려오면 그것을 받아썼다. 그나마 굶주린 배를 ‘눈물 젖은’ 한조각 100원짜리 식빵이 먹고 싶어 먼 길을 마다않고 걸었다. 깡보리밥과 달랑 김치만 들어 있는 것이 창피해서 도시락을 포기했다. 대신에 종종 나오는 드라마 장면처럼 점심시간이면 운동장 수도꼭찌에서 나오는 물로 배를 채웠다. 입안에 채워지는 물은 눈물이 섞여 조금 짭짤했다. 주말이면 공부는 뒷전이고 부모의 농사일을 돕거나 다른 집의 밭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학비납부는 반에서 늘 꼴찌였다. 그마나 외삼촌이 3년간 담임 선생님을 해서 거액(?)의 장학금을 받아 육성회비만 냈다. 학교를 다닌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한복 아티스트가 되었고, 사업체까지 차렸을까. 고교 3년 때 제주시내의 한 건설회사에 실습을 나갔다. 하루 종일 콘크리트를 섞는 일이었다. 이게 아니다 싶어 고교 3학년 2학기 때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군 입대하기 전에 ‘장사’를 배워볼 생각으로 취직한 곳이 광장시장 포목점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늘 ‘광장대학’을 졸업했다고 말한다. 학벌에 대해서 그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사회는 학벌 순이 아님을 그는 잘 안다. 최근 ‘금수저’ 논란이 일고 있지만 자신만 부지런히 노력하고 희생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존 철학’이다.
물론 학벌로 인해 걸림돌이 생긴 적이 있다. 결혼을 앞두고. 아내는 교육자 집안의 딸이었다. 반대에 부딪친 것은 뻔한 일. 그래서 일단 6개월짜리 대학원 최고위과정으로 때우고 식을 올렸다. 언젠가는 정규대학에서 한복디자인이나 유통을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약속하고.
말이 포목점 점원이지 손님을 호객하는 ‘삐끼’였다. 하루일과는 간단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저녁 6시 퇴근이었다. 종일 살을 에는 듯 한 강추위와의 전쟁이었다. 끼니는 연탄불에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전부였다. 쉬는 날이 없었다. 이때 한 달 일하고 손에 쥔 돈은 고작 8만원. 1987년 겨울이다. 제대 후 한복점에 취직했다. 기성복 판매점이었다. 그러다가 당시 가장 유명한 실크직물회사인 동명실크의 영업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남강직물과 쌍두마차를 이루면서도 거래처는 겨우 20여곳. 이전의 경험을 살려 200여곳으로 늘렸다. 한복 카탈로그를 만들어 배포하면서 인기가 폭발했다. 원단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였다. 연간 50~60억 원씩 수금하고 다닐 정도였다. 이때가 93년. 월급이 60만원이었다. 재고를 털어내면서 큰 차익을 남겼다. 이때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오너가 되면 좋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부장을 끝으로 샐러리맨을 청산했다. 광장시장 먹자골목내의 8평짜리 경복궁주단을 인수해 한복전문점 ‘봅데강’을 오픈했다. 도매와 도소매, 그리고 소매를 겸한 ‘김태원의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는 직조는 물론 염색, 원단기술을 터득한데다 한복시장의 흐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전통시장에 한계를 느낀 그는 2003년 청담동에 새로운 둥지를 튼다. 한복이 강북시대에서 강남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눈치 챘 것이다. 2011년까지 80평짜리를 운영하다가 압구정 로데오 거리고 이전했다. 그러면서 웨딩박람회에 출품도 하고, 작은 패션쇼도 열었다.
“‘열정’이고 ‘정성’이고 ‘아름다움’이죠. 골프보다는 쉽지만 한복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복식(服飾)은 누구나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복이 다른 나라의 옷보다 특별하려면 무엇인가 차별화돼야 합니다. 사실 어느 나라든 그들의 옷도 입으면 편하고 미(美)에 기초를 합니다. 따라서 그동안 한복이 맵시나 백의(白衣)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면 이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는 한복의 미를 어디에서 찾았을까. “한복을 입었을 때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 즉 선이나 배색의 외형가치에 먼저 주안점을 둔닙다. 그런 뒤 개인의 감정이 이입된 주관적인 조형미를 잘 관찰하면 아름다움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이 그가 한복을 바라보는 심미안이다.
“고객 상담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일단 한복은 특별한 날에 입는 특수복인데도 묘하게도 열분 중 아홉 분은 처음부터 ‘잘못된 옷’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요. 양복처럼 치수에 맞으면 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한복은 절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죠. 심지어 ‘치마에 왜 주름을 지게 했느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치마의 주름자체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인데...주름이 없으면 일반 치마와 뭐가 다릅니까?”
그만이 느끼는 한복의 장점은 무엇일까.
“입는 순간 자연스럽게 몸가짐이 단정해지잖아요. 이것만으로도 여성스러움을 잘 나타내주고요. 여기에 고운 자태는 덤이고요. 하지만 입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해 현대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한 날에 입기 때문에 입을 때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마음껏 멋을 부릴 수 있는데다 일단 입으면 이보다 편한 옷이 없잖아요. 한복의 남다른 강점이죠.”
골프와 한복의 공통점이 있을까 하고 그에게 물었다. “골프도 한복도 어렵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은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골프와 한복 짓기는 ‘멋’을 아는 스포츠이고 생활인 것 같다”고 말했다.
280야드를 날리는 장타력에 비해 베스트스코어는 82타. 이글도 해봤지만 여전히 더블파도 나오고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한다.
김태원 대표는 “기회가 된다면 골프장에서 타이거 우즈나 로리 매킬로이 등 세계 최고의 골프스타들에게 한복을 입혀 투어가 열리는 골프코스에서 패션쇼를 해보고 싶은 것”이라며 “한복이 세계에 진출해 ‘코리아’브랜드를 알리고 국격(國格)을 높이는데 일익을 담당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특히 오는 2월에 현대차가 주최하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제네시스 오픈에서 우승한 챔피언에게 자신의 한복을 입혀주고 싶단다. 그의 꿈이 현실로 다가올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