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에 요절한 박원희(1897~1928)는 충남 대전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투쟁적이었다. 학교에 안 보내주는 어머니에 맞서 단식투쟁 끝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20년 김사국과 결혼, 다시 일본에서 유학하며 어렵사리 공부하였다.
간도에서 청년교양운동 교사로 운동가로 헌신하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과 함께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에 참여하였다. 1923년 남편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한 데 동참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을 위한 사회주의 이론에 투철했던 그는 남편과 5년간 결혼 생활에 딸 하나를 두었다. 결핵으로 순국한 남편의 뒤를 이은 듯 2년도 채 안 돼 감기 몸살 같은 일상의 병에 그도 쓰러졌다. 그만큼 사회운동 항일여성운동에 몸을 사리지 않았던 것이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 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 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총망라되어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 모집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 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온갖 힘과 열성을 항일 민족 투쟁과 여성운동의 선봉에서 헌신했다.
그러던 그의 죽음은 말 그대로 시대의 큰 아픔이었으며, 민족과 여성 사회의 손실이었다. 많은 사회단체의 남녀동지들과 노동자들의 애도가 넘쳐난 그의 장례는 여성으로는 처음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었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고 대전 현충원 애국열사묘에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