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잘난 정치인들’께 고합니다

입력 2017-03-1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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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종교학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불안합니다. 아니, 아예 겁이 난다고 해야 좋을지도 모릅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긴 그늘이 드리울 거라는 예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커다란 소용돌이가 한바탕 일었는데, 그것도 사람들 마음속에서 인 것인데, 마치 작은 호수에서 있었던 일인 양 곧 잔잔해질 까닭은 없습니다.

어제 청와대를 나와 자택으로 돌아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승복을 밝히면서 둘로 갈라진 국민들의 통합과 화해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또 한 번 실망했습니다. 자기반성이 결여된 이 불복의 메시지가 새로운 그늘을 또 키우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정말 불안합니다.

그렇다 해도 조금씩 사람 마음은 세월이 잠재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세월은 참 고맙게도 어떤 사람들의 어떤 격한 마음도 하루가 다르게 가라앉히고, 불같은 열정도 서서히 식히고, 정신없이 서두르던 몸짓도 한결 느긋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되면 소용돌이 속에서 얻은 것도 보이고 잃은 것도 살피게 됩니다. 내 발언의 잘잘못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못 듣던 것도 듣게 되고 잘못 들었던 것도 고쳐 다시 듣게 됩니다. 소용돌이 속에서 뿌듯했던 보람도 다듬어지지만 또한 설레발 떨던 부끄러운 일도 가릴 수 없이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그렇게 되어갈 만한 세월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겪은 그야말로 미증유의 소용돌이를 지낸 것이 겨우 며칠 전 일이니까요. 게다가 사람살이는 자연현상과는 다릅니다. 오죽해야 옛날부터 인위(人爲)를 자연을 거스르는 것으로 묘사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살이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득한 때부터 인위를 다스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소용돌이는 그나마 조금씩 잠잠해집니다.

그런데 불안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위를 다스리려는 낌새가 아무리 짧은 시간을 지냈지만 어디서든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점잖고 훌륭한 어른들께서는 한결같이 귀한 말씀으로 이제 결정에 승복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새로 시작하자고 격려도 하십니다. 커다란 하나를 말씀하시면서 지금의 나라 형편과 내일의 나라와 후손을 진정으로 염려하자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지당하고 고마운 말씀입니다. 큰 어른들의 말씀이 아니어도 이제는 우리도 성숙한 ‘민주시민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불안할 까닭도 없고, 이 소용돌이를 다스리려는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고 전제한 것은 아무래도 바른 판단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전제를 취소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하는 분들한테서는 어느 분에게서도 진심 어린 그런 발언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승리와 패배, 척결과 복수의 정서가 이념적으로 추구되고 있고, 공학적으로 조작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소용돌이의 지속을 부추길 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의 모색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속은 모두의 익사(溺死)를 담보하는 일일 뿐입니다. 아니, 우리가 겪은 소용돌이의 일렁임이 바로 그러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살피지 않는 일이라서 두려움은 더 절실한 현실이 됩니다.

궁금한 것은 왜 승리와 척결, 패배와 복수 같은 동물적인 반응이 이른바 다스림을 의도하는 주체들의 삶의 격률(格率)이 되고 있음이 지양(止揚)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이른바 정치하는 분들이 스스로 자신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하는, 또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잘났다’고 하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것은 당연히 보통 사람하고는 다른 온전하고 두드러진 품격과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고, 바로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의식에 흠뻑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의식, 그러한 신념, 그러한 긍지가 얼마나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의연하게 하는지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독선과 배타, 오만과 방자함, 그릇된 인식과 왜곡된 환상을 낳게 하고, 그를 그 속에 머물게 하는지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정말 이러한 자의식 없이 정치를 할 수는 없는 걸까요? ‘나는 모자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공인이 되어 다스림을 통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 하지만 참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 책임은 내가 진다.’ 이러면 정치를 할 수 없는 걸까요?

대통령 선거가 곧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는 사람들이 이제 눈에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개가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 중에서 가장 ‘못난 후보자’가 누군지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야 이 이어지는 불안이 그나마 좀 가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에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불어 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도 감히 곁들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잘나셨으면 혼자 사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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