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대신 빵 소비가 증가하던 시절 한국의 모 대기업이 소비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야심차게 빵 굽는 기계를 시장에 출시한 적이 있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 빵 굽는 기계는 지금 기준을 적용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탁월한 성능을 자랑하는 걸작품이었음에도, 소비자들로부터 보기 좋게 외면을 받았다 한다. 빵 굽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보통에 맞추면 6시간, 속성에 맞추어도 4시간이나 걸리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라면이나 햇반류의 즉석식품이 소비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웃프기(?)까지 하다.
파울루 코엘루의 소설 ‘불륜(Adultery)’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인간은 흔히 지네나 뱀을 보면 순간적으로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오래전 원시 공동체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여부를 따져보면 지네나 뱀에 물려 죽을 확률보다 자동차 사고로 인해 치명상(致命傷)을 입을 확률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앞에선 거의 위축되지 않지만, 미물 앞에서 오히려 더욱 큰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란다.
그러고 보면 ‘빨리빨리’는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특성임이 분명한 것 같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온 오랜 경험이 우리네 특유의 ‘빨리빨리’ 기질과 관습을 만들어낸 토양이 아닐는지.
예전에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동료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막 지역으로 기후 변화가 거의 없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던’ 오클라호마에서는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국에 돌아오고 보니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는 이야기였다.
농촌에서 생활해 보니 동료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실감난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노글노글 풀리고 곳곳에서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면, 동네 어르신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분주해지면서 마음 또한 덩달아 조바심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트랙터로 밭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밭에 널린 잔솔가지에 풀더미 긁어 태우는 손길이 바빠지더니, 곧이어 퀴퀴한 거름 냄새가 온 마을을 뒤덮는다. 꽃망울이 맺히는 걸 보며 ‘봄이 왔구나’ 싶었는데, 어느새 꽃망울이 활짝 터지며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로 피어나고 매실 나무도 하얀 꽃으로 뒤덮였다.
지금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올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될까 보아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세월의 기억이 우리네 의식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어, 부지런함과 조급함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기야 ‘빨리빨리’ 기질 덕분에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빨리 가자던 소망을 이루었다. 그렇긴 해도 ‘빨리빨리’가 득(得)이 되기보다 독(毒)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임을 경계할 일이다.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고, 5월 9일 대선(大選) 일정이 공표되면서 너나없이 마음도 바빠지고 발걸음도 빨라지는 상황이고 보니, ‘빨리빨리’ 정신에 발목 잡힌 나머지 한 단계 성숙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리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두렵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하기까지 값비싼 희생을 치른 이유가 진정 무엇이었는지, 과연 우리가 해소해야 할 제왕적 대통령제의 적폐(積弊)는 무엇인지, 실로 국민이 열망하는 선진적 정치 제도의 구체적 모습은 어떤 것일지, 정권 교체든 정치 교체든 새정치든 무늬만의 변화가 아니라 실질적 체질 개선을 가져올 성숙한 정치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등,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릴지라도 진정성 있는 해법을 찾아 나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