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해야 할 책임’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 ‘구실’의 한자 표기는 ‘口實’이다. 각 글자는 ‘입 구’, ‘사실 실’이라고 훈독한다. 그러므로 구실은 원래 ‘입에 채워주는 실질적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즉 ‘먹거리’를 통칭하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뜻이 확대되어 봉록(俸祿), 즉 월급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저승길에 먹으라며 죽은 사람의 입에 넣어주던 밥을 구실이라고도 했다.
먹거리나 월급처럼 현실성이 짙은 ‘사실’은 없다. 그래서 구실은 사실에 바탕을 둔 ‘바른 말(정론:定論)’이라는 의미로까지 뜻이 확대되었다. 중국 송나라 사람 소순(蘇洵)이 쓴 ‘중형자문보설(仲兄字文甫說:둘째 형의 자를 ‘문보’라고 지은 것에 대한 설명)’에 나오는 “옛날 군자들은 말로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부득이한 경우, 말을 하면 천하 사람들은 그 말을 정론으로 여겼다(昔者君子…不求有言, 不得已而言出, 則天下以爲口實)”라는 구절이 대표적인 용례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제 구실도 못한다”라는 말도 원래는 제 입을 채울 먹거리도 제대로 못 챙긴다는 의미였으나 이것이 나중에 역할이나 책임이라는 말로 뜻이 확대되었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은 위험하다. 의사가 제 구실을 못하면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게 되고, 교사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면 남의 귀한 자식들을 망칠 수 있으며, 군대가 제 구실을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입을 실질과 사실로 채움으로써 각자가 구실을 다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구실이라는 말이 ‘핑계’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구실을 확실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없는 구실을 찾거나 뭔가를 구실 삼아 다른 일을 하려 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정부도, 개인도 뭔가를 구실 삼으려 하는 태도를 버리고 제 구실을 다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