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사태는 그야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이자 천재지변이었습니다. 그동안 주먹구구식 시스템으로 운영되면서 기형적으로 팽창했던 대중국 화장품 수출 시장은 이번 기회에 새로 태어나는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최근 찾아간 국내 화장품 도매 총판의 본거지 중 하나인 서울 화곡동 도매거리에서 한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화장품업계는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보복에 직격탄을 맞은 지 반년여가 지난 8월 말 한중수교 25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사드 사태 장기화로 화장품주는 14조 원이 증발했고 화장품 업계 1위인 아모레퍼시픽그룹은 2분기 실적이 반토막 난 실정이다.
중국과 거래하던 큰손 도매상들이 즐비했던 이곳 화곡동 도매 점포들은 최소 인력만 남겨두고 있다. 중국인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제주에서 매장 여러 곳을 경영했던 굵직한 도매업체는 폐점했고, 사후 면세점들은 줄줄이 도산했다며 울상인 곳도 많았다. 한 도매업체 관계자는 “80% 이상 매출이 감소했다. 중국 큰손으로 늘 붐비던 주차장은 보다시피 텅 빈 지 오래”라고 토로했다.
그런가 하면 사드 사태 이전부터 타오바오 등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과 총판 거래를 뚫은 업체나 홍콩 등 중화권 드럭스토어, 동남아 시장과 개척 단계의 거래를 해오며 중국 의존도를 낮춰 리스크를 피한 업체들도 있다. 이들 업체는 공통적으로 “사드 리스크 이후 기형적인 K-뷰티 업계 전반이 정화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1992년 두 손을 맞잡은 한중 무역에서 화장품 시장이야말로 폭발적 성장세를 거듭한 소비재의 ‘히어로’였다. 지난해 한국의 화장품 수출액은 39억7100만 달러를 기록, 전년(27억5100만 달러)보다 44.3% 증가했다. 이 가운데 중국 수출은 전체의 36.5%인 14억5000만 달러(약 1조6907억 원)를 차지했다.
그러나 사드 이후 현장은 딴판이 돼버렸다. 그동안 대중국 K-뷰티 수출시장은 중국 공산당의 묵인하에 이뤄지던 따이공(보따리상), 중국 위생청으로부터 위생 허가, 온라인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이뤄져왔는데 사실상 따이공의 비중이 70~80%였다. 그러나 사드 제재 이후 따이공의 문턱이 공식적으로 막히면서 국내 유관 제조사, 유통채널들의 숨통도 막혔다.
정식으로 중국 CFDA 위생 허가를 받으려면, 신청부터 허가까지 품목당 약 4개월, 400만 원가량의 비용이 든다. 10개 품목이면 4000만 원이다. 여기에 비교적 높은 수준의 부과세 17%, 증치세 등 관세와 배송단가까지 종전 제품가의 30%가량이 더 붙게 된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사드 이전에는 중국과 수요가 맞아떨어져 따이공의 비중이 컸던 것”이라며 “이런 부담을 제대로 감당할 업체들이 얼마나 있겠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화장품 업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제조사 관계자는 “화장품 업계는 중국 시장에 의존해 기형적으로 성장했던 각종 ‘개미’ 도매상들이 넘쳐났다. 2014년 메르스 사태에 이어 이번 사드 사태까지 장기화하면서 사업을 접고 업종을 전환하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중국발 사드 타격을 비껴나가는 제조사, 총판상들은 적극적으로 중국 온라인 플랫폼 이즈보 등과 연계해 왕홍(중국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주력하거나 해외 판매 권리를 일임한 총판의 특장점을 활용한다. 또 미국 아마존과 직접 거래하고 비중화권 드럭스토어 시장 등으로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사드 리스크가 사라진다 해도 K-뷰티 시장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띨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사드를 계기로 주먹구구식에서 벗어나 온라인 대응책을 갖춰야 하며 중국 세관들도 보다 공정하고 까다로운 관세 정책을 수립하는 분위기라는 것.
중국 기업들도 변화 조짐이 보인다. 에이프릴스킨 등 브랜드를 총판하는 코코메이 관계자는 “사드 이후 중국의 대기업, 그룹사들이 직접 나서 코스메틱 사업 부서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사드 이전부터 해외 법인을 설립해 중국 시장 의존도를 낮췄고 자체 온라인 플랫폼을 보유했다”며 “과거에는 회사 내 재무를 제외한 물류 인력이 대부분이던 데 비해 이젠 해외 마케팅 인력이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무분별한 중국바라기는 줄어드는 대신 중국 사업에서 옥석가리기는 가속화할 것”이라며 “업체별 희비는 엇갈리겠지만 K-뷰티 전체로 볼 때 경쟁력 상승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