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경찰’이 관객과 만나면서 젠더 감수성을 찾아볼 수 없는 영화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영화 ‘토일렛’은 강남역 여자 화장실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여자들에게 모욕당한 남자가 일행과 함께 복수를 시도하면서 벌어지는 범죄 심리 스릴러다.” 8월에 개봉한 영화 ‘토일렛’의 보도자료 일부다. 일부 매체에 이 내용이 보도된 직후 여성 살인사건마저 홍보로 활용하는 저열한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최근 관객과 만나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여성 혐오 논란이 뜨겁다. 물론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범죄는 장르 영화의 표현기법이라는 제작진의 해명과 전문가의 주장이 나왔다. 맥락과 개연성에 관한 판단 없이 특정한 표현만을 문제 삼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죽이는 파시즘적 행태라는 반박도 뒤따랐다.
근래 관객과 만난 ‘추격자’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내부자들’ 등 흥행에 성공한 남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한국 영화에서 여성은 철저히 폭력과 범죄 대상으로 도구화했다. 또한, 여성 혐오가 강한 남성 정체성 확보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에 대해 여성학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의 비판이 제기됐다.
그리고 지난해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남자의 칼에 무참히 살해당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 혐오 범죄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일반 여성 관객까지 한국 영화의 성차별과 여성 혐오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한국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 빈도의 차이부터 여성을 가정주부, 섹스와 범죄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성 역할의 차별까지 적지 않은 문제를 노출했다. 또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을 유혹해 타락하게 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부정적 재현도 반복했다. 상당수 한국 영화는 여성을 왜곡된 시각에서 바라보게끔 관객을 끊임없이 호명(interpellation)했다.
이런 상황에서 ‘브이아이피’를 계기로 촉발된, 한국 영화의 여성 혐오에 대한 일반 관객의 비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성 언어가 장악한 한국 영화와 비평 담론에 대한 젠더 감수성이 담보된 비판의 언명(言明)은 한국 영화 안팎에서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상황을 묘파(描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단초(端初)를 제공하는 유의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성학 강사 정희진은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라고 단언한다. 한국 영화의 여성 혐오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 제기와 비판은 남녀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 남녀 언어가 공존하는 한국 영화의 등장 가능성을 배가한다. 더 나아가 “여자라서 차별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살해 대상까지 됐다”라는 공포와 분노가 분출하는 한국 사회를 극복하고 남녀가 서로 존중하는 사회로 나가는 데 일조한다.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이 남자는 상대가 여성이면 지적 수준이나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과 상관없이 모르는 것으로 간주해 설명하고 가르치려 든다는 의미의 ‘맨스플레인(Mansplain· Man+Explain)’이라는 신조어를 등장시켜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여성 차별을 유형화·구체화한 것처럼 이제 한국 영화 안팎의 여성 차별과 혐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판과 비평, 논쟁, 문제 제기 등 언명 작업은 더 활성화해야 한다.
‘브이아이피’의 여성 혐오 비판이 없었다면 ‘여자 시체 역’이라는 배역 명이 ‘여자 역’으로 수정됐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