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옹주는 조선총독부의 정책 때문에 6세가 되어서야 정식 왕공족(王公族)으로 등록되고 1921년 10세 때 ‘덕혜’라는 호를 받았다. 덕혜옹주가 8세 때인 1919년 1월 21일에 고종이 승하하였다.
10세가 되는 1921년 4월 1일 일본인 귀족 자제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일출심상소학교(日出尋常小學校)에 입학하였다. 5학년 때인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는 도쿄의 영친왕 이은(李垠)이 거처하던 집에서 생활하면서 일본 황족이나 귀족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세워진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1년 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서거하고, 1929년에는 생모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梁氏)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덕혜옹주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 조발성 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다. 일본은 영친왕에 이어 덕혜옹주도 일본인과의 혼인을 추진했다. 1931년 5월 8일 대마도 번주의 아들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1908~1985)와 도쿄에서 정략 결혼하였다. 다음 해인 1932년 8월에 딸 마사에(정혜·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정신질환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다케유키가 백작 지위를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1946년에 덕혜옹주를 도쿄 도립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입원해 있는 동안 딸 정혜는 편지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그 후 1955년 6월 남편은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하였다.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었던 김을한(金乙漢·1906~1992)은 1950년 덕혜옹주의 소식을 접하고 환국을 추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제국 황손들의 귀국을 반대하였다. 그 후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에게 알려져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51세 때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떠난 지 38년 만이었다.
귀국 직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고, 그해 2월 28일 ‘이덕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다. 1967년 5월 퇴원하여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의 수강재(壽康齋)에서 기거하였다. 1989년 4월 21일 78세로 영면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洪裕陵)에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