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환경이 점점 열악해지는 국내 골프장을 전국 네트워크로 묶어야만 상생하는 길이죠.”
국내 최대의 부킹 전문을 비롯해 골프장 기업인수합병(M&A) 등 골프장 관련 전문기업을 운영하는 김종식 케이스타플러스 대표이사는 국내 처음으로 부킹 전문회사를 차린 기업이다. 미래의 골프장이 상생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해 업계에서는 드물게 블루오션을 창출한 대표주자다.
그가 골프계에 발을 들인 것은 군 제대 후. 대구 출생인 그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대학에 입학한 뒤 바로 군에 입대했다. 수송병으로 제대했다. 초교부터 중장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한 그는 충북 상떼힐 컨트리클럽(구 장호원) 경기과에 입사했다. 견습 시절 캐디도 해봤고, 헤드프로덕에 골프도 배웠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직장상사가 골프장만 보지 말고 앞으로 할 사업을 구상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해줬다. 이것이 밑거름이 된 것일까. 경기도 용인 아시아나컨트리클럽으로 직장을 옮기면서도 ‘사업을 하라’는 말이 늘 귓가에 맴돌았다. 11년간 직장생활을 마치고 사업 구상을 하며 골프 플레이를 즐겼다. 이때 일본을 비롯해 선진국의 골프산업 관련 연구를 했다. 관련 서적의 독서량도 엄청나게 늘렸다. 아는 것이 힘인가. 공부를 하다 보니 해법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부킹사업’이었다. 골프장과 골퍼의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틈새시장이었던 것. 골프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데 골프 인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골프장의 빈 티오프 시간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왼-왼(win-win)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골프장 부킹을 대행해 주면 골프장도 살고, 제가 계획한 사업도 성공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죠.”
하지만 생각대로 녹록지가 않았다. 골프장을 떠나니 ‘끈’이 떨어졌다. 골프장을 벗어나자마자 그동안 만들어 놓은 골프 인연이 멀어졌다. 그래서 구상한 것이 협회였다. 2008년 한국프로티칭골프협회를 창설했다. 골프장과 함께할 사업으로 제격이었다. 레슨을 전문으로 할 선수들을 모집해 테스트를 거쳐 교육을 시킨 뒤 자격을 주었다. 그러고는 골프장 문을 두드렸다. 고객을 보내면 티칭협회 회원들에게 혜택을 달라는 것. 골프장은 빈 시간을 채워 매출을 올리고, 아마추어 골퍼에게는 보다 저렴하게 이용하면서 레슨까지 받는 1석2조의 프로그램이었다. 먹혔다. 회원이 수천 명으로 늘면서 협회는 잘 굴러갔다. 그런데 수익이 별로 없었다.
골프장의 잔여 시간을 없애주는 것은 골프장에 이익을 줬지만 그의 사업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착안해 낸 것이 ‘골프비서’였다. 부킹이 필요한 사람과 골프장의 빈 시간을 연결해주면 ‘반대급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크린 골프와 여성골퍼의 증가, 그리고 SNS 등 새로운 골프 문화가 형성된 것도 부킹 사업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그는 ‘성실맨’이다.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수도권 지역을 돌며 골퍼들을 채우지 못하는 골프장을 찾아 나섰다. 지방까지 확대하며 사업은 순조롭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암초에 부딪쳤다.
“사업이 잘되는가 싶었는데 시련이 닥쳤습니다. 믿고 맡긴 직원이 어느 날 그동안 모아 놓은 DB를 빼돌려 사라졌죠.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버스에서 내내 울었다. 막막하고 앞이 캄캄했다. 일단 살던 집을 빼서 급한 불부터 껐다. 생활 터전이 없던 그는 복층 사무실에 집사람과 1년간 살았다.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만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끈기’ 하나로 버틴 그에게 희망의 빛이 보였다. 행운을 안겨준 골프장은 블루원 용인 컨트리클럽이다. 특히 블루원의 윤여정 운영팀장의 열정이 큰 역할을 해줬다. 남들이 잠든 새벽에도 예약을 받아줬다.
블루원 용인에 힘입어 수도권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산과 영남지역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반응이 냉랭했다. 특히 지역에서 이미 자리 잡은 동종 업체가 장애물이었다.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그를 알아준 사람은 양산 에덴밸리 컨트리클럽 배진원 회장이었다. 다른 골프장을 동행하면서 밀어준 덕에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무려 8년이나 걸렸다. 물이 오르자 그는 호남지역까지 밀어붙였다.
그는 골프장 직원이 아니면서도 골프장 지역협의회 실무자들자 모임의 정회원이 됐다. 이들 모임은 그가 사업을 이어가는 데 단단한 밑거름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사업은 무조건 골프장이 잘 돌아가야 합니다. 골프 인구는 정체되는데 골프장이 늘어난다면 결국 골프장의 수익은 줄어들 게 뻔합니다. 따라서 골프장 경영은 골퍼들을 유치하는 데 묘수를 찾아야 합니다.”
그는 앞으로 골프장의 생존은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 실행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비스는 기본이고, 골퍼들의 니즈에 걸맞은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 직원이 합심해 골프장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골프장 경영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안 되는 것이 없다’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는 그는 골프도 수준급이다. 골프계에서는 ‘작은 거인’으로 불린다. 161㎝의 키에 드라이버 비거리 280야드를 날린다. 베스트스코어는 블루버드 컨트리클럽에서 6언더파 66타를 쳤다. 기억에 남는 것은 2006년 스카이72골프앤리조트 하늘코스 챔피언 티잉그라운드에서 플레이를 해 2언더파 70타를 친 것이다.
골프장들이 상생할 수 있는 잔여 타임의 부킹에 관해 전국 네트워크를 구상 중인 김종식 대표가 경영난에 허덕이는 일부 골프장을 어떻게 살릴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