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숫자를 추구하고 숫자로 기억되는 곳, 바로 은행이다. 6조6609억 원. 올해 상반기 6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KEB하나·NH농협·IBK기업은행)의 당기 순이익이다. 저마다 '영업1등'을 목표로 내세운 결과물이다. 평균 연봉 1억 원 육박. 은행원에 대한 탐욕적 색채를 입힌 불편한 이름표다. 이러한 이름표로 취업 준비생은 물론 대다수 직장인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리딩뱅크’를 향한 과도한 업무와 끝없는 실적 경쟁에 목숨을 잃는 은행원이 있다. 고액 연봉 꼬리표는 은행 직원들의 노동을 가벼이 취급하고, 그들의 과로를 돈과 등가교환한 것처럼 간주하게 했다. 하지만 높은 임금도 법을 넘나들고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 노동을 정당화하긴 어렵다. ‘이투데이’가 삶을 잃거나 포기하는 은행원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문제와 해법을 고민한다.
은행원은 ‘감정노동자’다. 페르소나 뒤에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고객 앞에서 웃는다. 은행이 외치는 ‘디지털화’에도 불구하고 맨 처음 고객을 끌어오는 수단은 결국 ‘영업’이기 때문이다. 직급에 상관없이 고객 모집에 나선다. “대리 때부터 미용실을 주 무대로 세탁소와 빵집 등을 영업 핵심 포인트로 삼았다. 평소에 꾸준히 들러 친하게 지냈고 끝내 고객으로 만들었다.” 어느 시중은행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은행이 영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를 보여준다. 영업의 대상 ‘고객’은 은행원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 요소지만, 스트레스와 죽음의 ‘인과관계’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감정노동자’ 은행원… 애매모호한 인과관계 = 은행 직원들은 하나같이 ‘고객 응대’를 업무상 가장 힘든 점으로 꼽는다. 한 시중은행 영업점에서 일했던 A씨는 “꼭 점심시간 때만 되면 찾아와서 빨리 처리해달라고 행패를 부리는 고객이 있었다. 화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분을 삼켜 욕만 늘었다”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다른 은행에서 일하는 B씨는 “은행이 기본적으로 서비스업이라 사람 대하는 것이 참 어렵다. 진상 손님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맡긴 돈이 많다고 갑질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을 해달라고 떼 쓴다”며 혀를 내둘렀다. 최근에는 영업점 인력이 줄어들어 1인당 고객 수가 늘어나 업무 부담이 크다고 한다.
돈을 관리하는 일이다 보니 일의 긴장도도 높은 편이다. 한 시중은행 직원 C씨는 처음 입사 뒤 1년 동안 마감이 끝나면 미친 듯이 쏟아지는 잠에 힘들었다고 한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이다. 그는 “은행원들 가운데 위염이나 위궤양, 허리디스크 등을 앓고 있는 사람이 상당수다. 처음 들어와서 놀란 것이 한 달에 1~2명 병가를 쓰는데 진짜 중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병가를 쓰면 인사부에서 승진을 안 시켜줘서 수술받기 직전까지 일하는 사람이 허다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은 공단과 법원에서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문제는 ‘상당한’의 모호함이다. 승인율이 75%에 달하는 교통사고 산재와 달리 뇌심혈관 질환이나 우울증 산재 승인율이 33%에 불과한 이유다. 서울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중요한 것은 ‘업무 관련성’인데 그 기준이 모호해서 사실상 법원(재판부)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며 속내를 내비쳤다.
◇엇갈리는 판결… ‘근로시간’ 산정도 어려워 = 실제로 비슷한 사례에서 판결은 엇갈린다. 신한은행 지점장(1면 사례)의 유족은 1·2심 모두 졌다. 그러나 유족이 이긴 사례도 있다. NH농협은행 과장보였던 D씨는 2016년 사무실에서 일하던 도중 쓰러졌다. 곧바로 응급실로 옮졌으나 나흘 뒤 사망했다. 이 사건 역시 공단은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고, 소송으로 이어졌다.
1심 재판부는 “소속 부서 조직 개편과 동료 직원들의 교체, 복잡하고 생소한 업무 내용, 재해 발생 직전 업무량 증가와 긴급한 업무상 문제 발생 등으로 과로와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고용노동부 고시에 들어맞지 않는 점이 있었으나 “고시는 예시 규정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2심 재판부 판단도 같았다. 고용노동부는 발병 전 1주, 4주, 12주 동안 각 일정 시간을 초과해 일해야 한다는 등 산재 근무시간 기준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부마다 이를 고려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은행은 그동안 ‘포괄임금제’에 묶여 있어 산재 판단 근거인 근로시간을 제대로 산정하기 어려웠다. 포괄임금제는 연장·야간근무 등 시간 외 근무수당을 일괄적으로 급여에 포함하는 제도다. 초과근무시간을 정확히 세지 않고, 뭉뚱그려 수당을 주는 방식이다. 그나마 최근 ‘주 52시간제’ 도입과 포괄임금제를 보는 엄격해진 법원 잣대 덕에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KPI)’에 야근시간이 포함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KPI는 은행 직원 성과를 평가하는 핵심 지표다. 지점마다 야근시간(또는 일수)이 정해져 있어 기준을 넘으면 초과근무를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인사에 불이익을 받는다. 이 때문에 야근해도 수당을 못 받거나 일을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 다반사다. 시중은행 직원 E씨는 “은행은 상품이 많아 다 공부하고 파악해야 고객에게 제시할 수 있다. 공부 안 하면 설명을 못 해 악순환이다”며 퇴근 이후에도 이어지는 일을 설명했다.
◇특수고용직, 산재 가입 ‘그림의 떡’= 그나마 정규직이 대다수인 은행권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보험설계사와 대출모집인, 신용카드회원 모집인 등 제2금융권 특수고용직에게는 산재 가입은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특수고용직이란 위임·도급계약 형태로 일하는 개인사업자를 말한다. 법률상 사용자 지휘와 감독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일하도록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들의 ‘근로자성’이 꾸준히 문제로 지적된다.
현행법상 특수고용직도 산재보험 가입 대상이다. 다만 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별도로 신청하면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수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특수고용직 9개 직종의 가입률은 4월 기준 13%에 불과하다. 업계에서 특수고용직이 적극적으로 산재보험을 원하지 않는다고 보는 근거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단순하지 않다. 산재보험 가입을 주저하는 표면적 이유는 금전적 압박 때문이다. 보험설계사 간부급 한 직원은 “보험설계사 스스로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해 발생 시 불이익을 받는 회사 눈치를 봐야 하는 탓도 있다고 한다.
산재가 불필요한 이유로 ‘공상처리’를 꼽기도 한다. 공상처리는 사고가 발생하면 노동자 개인 보험으로 처리하고 회사가 금액을 보전하는 방식이다. 회사는 보험료 상승 위험을 줄이고 노동자는 보상금을 받기에 산재보험 대안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공상처리 이후 올라간 보험료는 결국 노동자 몫이다. 또 산재보험에 가입하면 받을 수 있는 재요양이나 장해 보상도 없다. 회사가 부도나거나 폐업하면 피해를 보상받을 길도 막힌다. 박사영 노무사는 “2~3일 짧은 입·퇴원을 하는 경우라면 문제가 없지만, 후유증이 생기거나 추가로 병원 진료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 공상 처리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교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내용상 직장인이고 직접 고용될 때와 업무 내용에서 차이가 없다”면서 “아직 개인에게 산재 비용을 부담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보호도 당연히 필요하다”면서도 “산재 가입은 비용이 늘어나고 있어 도입은 신중히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